인식은


맞서 싸워 고치면 됩니다. 작품의 질은 높이면 됩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볼 수 없는 환경을 수용자나 제작자가 타개해내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제한상영은 위헌이다"라는 결정을 내린 것도 현실적으로 극히 한정된 일부 극장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상 대중에게 매체를 접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회를 박탈한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TV애니메이션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물리적으로 볼 수 없는 시간대에 편성되어 방영되는 바람에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그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죠. 지금이야 VOD서비스를 각 방송사가 제공하고 있고, 케이블 등지에서는 재방송을 하거나, 그조차 안된다면 DVD 등을 구하면 됩니다만 당시엔 재방송도, DVD도, VOD도 없었습니다. 방영시간을 놓치면 평생 못봤었습니다. (단, 방송사가 제작지원한 일부 작품들은 VOD를 제공하기도 했고, 1~2년 후에 잠깐 DVD붐이 불어 마찬가지로 일부 작품의 DVD가 발매되긴 했습니다)


 아청법 때도 이야기한 거지만, 법은 절대로 대중문화를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접근성에 차이를 둘 뿐. 방영시간대나 권장시청연령도 결국 하나의 기준일 뿐 절대적인 법칙따윈 아니라는 거죠. 이를 근거로 현실적인 제한을 건다는 건 아주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고요.


90년대 후반, 아니 2000년대 극초반까지만해도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시간대는 대략 5시에서 7시 사이였습니다. 대략 5시 시간대엔 비교적 저연령대의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을, 6시 시간대엔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연령의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방영했죠. SBS가 당대 만화왕국으로 떠오른데엔 6시 시간대에 그랑죠, 대운동회, 엘하자드, 나데시코, 다간, 포켓몬스터 등의 작품들을 연달아 히트시킨데서 기인합니다. (5시 시간대에 방영했던 작품은 재밌는 고양이 펠릭스, 핑크팬더, 형사 가제트 류의 작품들이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그런데 2000년대 극초반을 살짝 넘어가면서부터 애니메이션 편성 시간대가 1, 2시간씩 당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TV에서 애니메이션을 접하던 이들- 특히 어린이를 넘어 청소년으로 접어드는 이들에겐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오후 3시에 학교를 마치게 되고, 중학생이 되면 오후 5시에 학교를 마치게 됩니다. 그들이 집으로 바로 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원을 가고, 독서실에 가죠. 이전에도 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서두르면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이르면 4시에서- 늦어도 5시면 방영이 되어버리는 작품들은 절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이나 성인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바뀌어 버린 현실


실제로 방영시간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던 프로그램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 이야기했던 바스토프레몬은 TV애니메이션의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방학시즌에 결방되는 치명적인 일을 겪어야 했는데, 이는 작품의 묘사와 방향을 놓고 방송사와 다퉈 제작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생긴 문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바스토프 레몬은 초반부의 호평과 별개로 결방 이후 사실상 이전의 설정과 상충하는 요소들을 늘어놓다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고, 방영 시간조차 일관되지 못한 문제점을 안게 되었습니다. 포켓몬스터와 동시간대 경쟁했던 작품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안타깝지 않을 수 없는 점이었죠.



 온라인 상점같은데 뒤적거리다보면 바스토프레몬 비매품 DVD를 발견할 수 있는데, 다른 게 아니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뉴타입 부록으로 준 적이 있었습니다.


가이스터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당시 전문가 평이나 당시 시청자들의 평을 보면 상당히 괜찮은 작품인 듯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을 실시간으로 시청한 사람은 제가 살면서 절 포함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당시 제 연령을 고려할 필요도 있습니다만, 당시 시청환경을 고려해보았을 때 이 시간대를 기다리며 관람하고 감상하는 시청자가 사실상 전멸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는 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15세 이상 연령대를 생각하고 10시대에 방영될 것이라 여겨진 작품이 7세 관람가로 탈바꿈되어 오후 5시에 방영되었으니 볼 사람도, 볼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던 것이죠. 사실상 예고된 결말이었던 겁니다. 결국 이 작품은 시청률 부진으로 절반만 방영된 채 조기종영되어 버렸으며 이후 일본에서 제작지원받아 남은 분량을 방영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바다의 전설 장보고라는 작품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당시 인터넷의 만화 카페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결코 그 제목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팬카페에서 결집된 사람들과 한국 애니메이션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순수한국제작 애니메이션인 바다의 전설 장보고가 5시 시간대에 배정되어 알지 못하는 사이 사라지는 건 곤란하다"며, 편성시간대를 변경코자 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의 대상이 되었거든요. 단순히 수천명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낸 데서 그친 게 아니라 각종 전문가들과 관련 종사자들도 "이 작품만은 그래선 안된다"라는 의견을 개진하였고, 실제로 5시, 5시 30분, 6시로 방영시간대가 서서히 늦춰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6시 30분에 방영되어야 했던 작품이었고, 제작사는 가이스터즈와 마찬가지로 좀 더 늦은 시간대에 방영되길 바랐었으니까요. 물론 공영방송인 KBS의 방영작이었던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겠죠.


 바다의 전설 장보고 같은 경우는 지금도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자료들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걸 얼마나 큰 위기로 바라봤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죠.


거기다 점차 바뀌어가는 현실상의 문제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유아원, 유치원의 운영시간이 오후 5시까지입니다. 등하원 시간을 생각하면 유치원생도 5시 정각에 시작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기가 힘들죠. 초등학생이 학교 수업을 마칠 때가 오후 3시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는 연령대기 때문에 학원 한 두군데만 다녀와도 오후 6시가 훌쩍 넘어갑니다. 중학생요? 마치는 시간이 오후 5시고 마찬가지로 학원 한 두군데만 다녀와도 오후 8시에 가까워 집니다. 고등학생은 야자만 마쳐도 오후 11시~12시인데 더 말할 것도 없죠. 성인도 마찬가지.


유치원생도 보기 힘든 오후 4~5시 시간대에 편성되면서, 이 시간대에 애니메이션을 방영한다는 건 사실상 그에 흥미를 가질만한 이가 보든 말든 방송사는 관심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악순환


먼저 앞서 언급된 작품들 상당수가 15세 이상 시청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해 봅시다.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기획과 제작기간을 고려해보면 사실상 90년대 당시 그것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여전히 방송사 등은 "애니메이션들은 아이들이 보는 것이다"라는 관점 아래 이 작품들의 제작에 관여했고, 결국 많은 작품들의 주요한 설정들이 많게는 12세, 심하게는 전체연령관람가의 기준에 맞춰 수정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설정이나 기획과 다른 형태의 작품이 되어 버렸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고요.


더 큰 문제는 심하게 당겨진 방영시간대가 이러한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겁니다. 볼 수 있는 사람들 자체가 적은데다 완성도가 떨어지니 시청률이 더 떨어지고, 방송사는 시청률이 낮으니 더 단가가 싼 시간대로 옮겨야 한다며 방영시간대를 더 당겨 버립니다. 6시30분에서 4시30분이라는 시간대까지 옮겨지면서 방송은 최소한의 안정적인 방영을 담보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시청률은 더 더욱 떨어집니다.


악순환이죠.


 주 시청자층이 볼 수 없는 시간대 편성→시청률이 떨어진다→더 이른 시간대로 변경→시청률이 더 떨어진다→결방 내지 폐지라는 악순환을 타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시청률이라는 건 일정한 안정성을 담보로 할 때 얻을 수 있는 성과입니다. 언제 종방될 지도 모를, 방영 시간이라는 게 언제 바뀔지 모를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죠. 그 대단한 정도전도 방영 시간대가 잠깐 바뀌자 시청률이 쫙 빠져 관계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했었으니까요.


앞선 바스토프 레몬, 바다의 전설 장보고, 그리고 이후의 스피어즈 모두 오락가락하는 편성시간으로 손해를 보았고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부당한 평가를 받았던 바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문화 산업의 총아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2등 내지 3등 문화 취급하며 최소한의 안정성도 담보해주지 않으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죠. 그네들에게 있어 애니메이션은 언제 편성을 빼고 지워도 큰 무리가 없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겁니다. 오죽하면 스포츠 재방송에 애니메이션 편성이 밀리는 일이 있었을까요.


애초에 4시~5시 시간대는 여러 특집프로그램이 시험적 방영이나 비인기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간대였습니다. 24시간 방영을 개시하고 나름의 시간대마다 그만의 시청자층이 있다 보는 지금과 는 엄연히 달랐죠. 엄연히 한국산 제작 애니메이션이 40%의 시청률을, 6시 시간대에 20% 시청률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방송사는 변화하는 흐름도 잡아내지 못했고, 최소한의 보장도 해주지 못했던 겁니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떠올려 보세요. 평일의 기상시간보다는 늦지만 결코 늦잠을 잤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간대에 배정된 덕에 오랜 시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너무 이른시간에 편성되었다면, 혹은 너무 늦은시간대에 편성되었다면 과연 이만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적절한 시간대에 배치되어 삶의 리듬에 긍정적으로 호응하며 영향을 주었던 이 프로그램만큼 편성시간대의 중요성을 알린 프로그램도 없을 겁니다.




 마무리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 문화 산업의 종사자들과 그 향유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며 그만의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데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과 만화 이야기 초반부 만화를 만들거나 보는 것이 죄악이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개벽할 만한 변화죠.


하지만 이러한 발전상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잔혹한 현실이 문화또 하나의 잔혹한 현실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따라주지 않는 정책이 그러했죠.


 애니메이션 쿼터제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한일이 삼국 합작 애니메이션인 몬타나 존스.


애니메이션 쿼터제와 총량제의 첨예한 대립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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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