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화되는


작품의 장르만큼, 개개 작품에 대해 기대하는 바 역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일례로 작중 등장인물들 사이의 커플링, 불합리한 상황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태도, 더 흥미롭게 전개될 수 있는 요소의 삽입 등등 셀 수도 없습니다. 이는 아무리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취향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고, 주목하는 바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단 한 컷 스치고 지나간 캐릭터에 꽂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원작을 재료로 삼아 자기의 욕구를 채우고픈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동인 작가들이죠. 팬과 창작자 양자에 다리를 걸친 이들은 창작의 수월함과 팬으로서의 욕구해소를 동시에 만족하기 위해 이러한 선택을 하였던 겁니다. 이 동인작품들은 원작의 설정을 변용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끌어와 특정 성향의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펼쳐졌지요.


 국내에 출간되기도 했던 드래곤볼 동인작품 모음집 드래곤볼 환상곡. 장르는 드라마순정에 가깝죠. 국내엔 대륙의 해리포터라 알려졌지만, 사실 해리포터를 패러디한 작품이었던 배리 트로터. 2차창작이라는 것은 이토록이나 그 구분점이 애매모호한 겁니다.


한국의 만화계에서 동인문화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PC통신 이후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90년대 초중반 당시 대학가의 만화 동아리는 아직 창작의 영역에까지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던 시기였고, 그들의 활동은 대개 모작이나 짧은 컷을 연출하는 정도에 국한되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여러 만화 잡지가 신인작가를 모집하기 시작하며 자연스레 동인작품의 제작, 그리고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일반 만화 팬덤에 동인문화가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2000년대 초반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동인 자체가 만화 작가를 향해 나가기 위한 이들만이 향유하던 제한된 문화였었는데, 만화 동아리 외의 다양한 루트로 인터넷에 여러 동인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80년대부터 축적된 일본의 동인지까지 공유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한국산 동인 작품은 저작권과 관련한 이런 저런 문제, 그리고 공유문제로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지요.


물론 이 과정에서 일종의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원작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만들어진 2차 창작물을 통칭하는 동인지 가운데엔 성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 동인지라는 단어가 그러한 작품들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변질되어 버린 겁니다.


또한 2차창작물인 동인지의 애매한 저작권으로 인해 본래의 저작권조차 무시되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죠.


 (좌) 심슨의 루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Dead Bart들 역시 동인작품의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동인작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왔다는 겁니다.

 (우) 2000년대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소식이 있었는데, 러브히나의 작가가 러브히나 캐릭터들로 성인물을 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아카마츠 켄이 성인지향의 동인지 등을 그렸다는 소식이 와전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오버 데뷔 이후에도 동인지를 그리는 작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아카마츠 켄은 러브히나를 즈음해선 과거의 동인행적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두 가지 였습니다. 하나는 원작품의 이미지를 해치는 것. 또 하나는 원작을 무시하는 동인지파가 생겨나는 것.


가장 먼저 원작품의 이미지를 해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동인지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많은 요소를 차용하면서, 동시에 원작이 만족시켜주지 않던 다른 요소를 충족시켜주려 하는 목적에서 탄생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때론 원작에 비해 자극적이거나 상충하는 이미지의 동인지가 나오기도 했죠. 문제는 당시 아직 2차창작과 동인지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다보니 원작과 동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겁니다. 믿기힘드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도 드래곤볼과 같은 작품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생각해보세요. 완결된지 오래인데다 커다란 인기를 끈 작품임에도 제작주체가 다른 콘텐츠간에 발생한 모순으로 팬덤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일본어에 대한 관심도 지금에 비해 낮았고, 그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졌던 시기 동인지는 원작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던 겁니다.


다른 문제는 원작을 무시하는 동인지 지지파가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데 저연령층 지향 콘텐츠를 시리어스 물로 바꾸어 놓은 동인지 작품을 "이게 진실이다." "원작 보다 낫다"는 식으로 '깽판'을 치는 이들이 생겨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이죠. 실제로 원작에 비해 깊은 이야기를 하는 동인지들이 소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원작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따져보아야 할 일입니다. 애초에 동인지는 원작이 구축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개된 2차창작물이고, 원작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원작이 수행해야 했던 세세한 상황 설정을 하지 않으면서 원작의 이미지는 그대로 차용해오는 편의성을 갖춘 작품이 일종의 색깔을 달리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작업은 아니죠.


 (좌) 에반게리온의 수많은 2차창작물 가운데서도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알려진 re-take. 반대로 그만큼 원작 지지파에게 불만을 부른 작품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이후 파생작에 영향을 준 2차창작물도 있습니다. 왜 그거 있잖아요. 신지가 지각하여 식빵물고 학교가다 레이와 부딪혀서...

 (우) 슬레이어즈의 루나 인버스는 동인작가들의 창작욕을 들끓게한 대표적인 캐릭터입니다. 실제로 슬레이어즈의 팬픽은 에반게리온 못지 않게 뜨거웠죠.


여하튼 동인지는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소통이 되어 주었습니다. 원작과 그 이외의 콘텐츠는 철저히 분리하고, 또한 본래의 콘텐츠를 존중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형성되었고요.


동시에 창작욕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펜을 잡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몇개씩 있었고, 이들은 이후 작가로 활동하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동인지란 용어 자체는 더욱 음화되었고, 만화 팬덤의 동인활동에 대한 인식 역시 특별히 나아졌다 보긴 힘들었습니다. 이것은 창작물 게시판 등이 활성화되었을 때, 그 때 즈음해서야 개선되었죠. 그리고 동인지는 무엇보다 구매하기보단 다운받는 것이 극단적으로 간편한 콘텐츠였다는 점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물론 원작자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있었지만, 2차창작이 무시되는 점 역시 저작권 인식을 구축하는데 있어 멀리보자면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었거든요.


 (좌) 당연하지만, 원작이 강한 이미지를 구축해놓을수록 그를 뒤틀었을 때의 충격은 큽니다. 

 (우) 한없이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료로서 무엇보다 큰 가치를 지닌 콘텐츠가 바로 저런 성향의 콘텐츠입니다. PC통신에 이어 인터넷으로 주 활동 매체가 바뀌고, 온갖 사유로 오리지널 콘텐츠가 날아가고 있으니까요.


여하튼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즐기는 수단이 늘어났고, 이것은 자연스레 오래된 작품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습니다. 유달리 짧은 만화의 사이클로 인해 절판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원하는 작품을 구매하지 못한 팬들의 요구가 출판사에 닿게 된 것이죠.


이 과정에서 고급화, 소장판 등의 개념이 결부되며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완전판 발매가 개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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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