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제가 더 이상 일반 단행본을 사지 않겠다 선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일반판의 경우 심심찮게 원작자의 의도가 배제된 수정이 가해진데다, 외국 작품의 경우 질낮은 번역까지 더해져 작품 그 자체로의 가치가 훼손된 상태로 발매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이기도 했죠. 90년대 중후반까지 만화는 청소년의 일탈의 책임을 부당하게 지는 위치에 서 있었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몸을 사려야 했습니다.


당장 아이큐점프의 드래곤볼에서 무라사키 상사의 상투가 지워져 있었던 일이나 오 나의 여신님 초반본에서 베르단디가 입었던 기모노가 한복으로 수정되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골때리는 연극부에서 야하지도 않은 키스씬을 그대로 잘라낸 사례는 또 어떤가요. 아예 뜻을 반대로, 그리고 수시로 오역해버린 헌터X헌터는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가 되었던 스포츠 만화들의 좌우반전은요? 그리고, 베르세르크처럼 성인용으로 발매되는 작품에서조차 이미지를 흐리게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 건요?


지금이야 오역과 이미지 수정을 제하면 어느 정도 해소된 문제들입니다만, 위 사례들이 작품을 즐기는데 문제가 되는 일들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고급형 판본의 만화는 바로 드래곤볼입니다.


잠시 소장의 개념으로 이야기를 돌려봅시다.


우리는 왜 먹고 사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은 것들을 모으는 걸까요? 과연 소장의 궁극적인 가치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답하긴 어렵지만 "슈퍼맨의 첫번째 이슈의 초판본이 수 십 년이 지나 보석보다 비싸졌다"는 식의 투자의 개념과 다르다는 걸 단언할 수 있을 겁니다. '소장'한다는 것은 소유권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의미로, 대상이 되는 매체를 언제나 어디서나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소유권의 개념은 이것을 전자적으로 변용했을 때 그 공유와 전송에 제한이 가해지긴 했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법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연하지만 자신이 소장한 것이 보다 좋은 것임을, 그리고 온전한 것임을 바라게 됩니다. 이것은 본능이죠. 똑같은 돈을 주고 샀는데 자신의 물건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떨어지는 것임을 용납하기는 힘들 겁니다. 하물며 물건 자체에 하자가 있다면 어떨까요? 일반판으로서의 발행은 결국 이러한 행태와 아주 유사합니다. 당장 원펀맨의 정발과 관련한 논란을 살펴보세요. 이미지를 수정하고, 이미지가 잘려 나가자 구매자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만화의 구매자들에게 있어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일반판을 가장 손쉽게 대체할 원서는 구매할 경로가 극히 제한되었었고 무엇보다 언어의 제한이 있었습니다. 다른 판형이 발매된 사례는 전무하다 말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고요. 사거나, 사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겁니다.


 무수정을 표방했지만 수정된 부분이 눈에 띄어 문제가 된 드래곤볼. "물로 보지 마"라는 유행어 아닌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죠. 20권쯤 나왔을 때 완전판이 발매되는 바람에 뿔이난 이들도 많았죠.


하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구매루트가 다양화되면서 만화를 구매할 수 있는 기회와 기간은 상대적으로 길어질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좋은 만화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가 널리 알려질 수 있게 되었고, 구매 자체도 이전의 통신판매와 비할 수 없이 수월해지게 된 덕이었죠.


결과적으로 현재의 화제작 외에, 과거의 명작들을 소장하고 싶어하는 마니아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는 재구매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일본에서도 애장판 발매 붐이 일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한국 내에서도 이미 절판이 오래된 작품들의 소장을 목적으로 한 고급형의 애장판 혹은 완전판들이 별도 판형으로 발매되기 시작했고, 만화 역시 중요한 소장의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그간 발매되어도 판매될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던 상징성 있는 작품들 역시 발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당시 구매하지 못한 게 아쉬운 마징가Z. 지금 권당 가격이... 같은 의미로 게타 로보를 구매하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무엇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카와 켄이 사망하는 바람에.


물론 불만도 많았습니다. 여타의 책들과 달리 여전히 선택의 폭이 적다는 점이 그것이었습니다. 일반판과 고급형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죠. 고급형 판본으로 출간되는 만화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나마 발매되는 책들도 일반판은 이미 절판된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나마 일반판과 애장판 등이 함께 판매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극히 일부였습니다. 일반판을 절판 시킨 후 고급형 판형을 판매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죠.


또한 고급형과 무삭제를 자청하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자격미달의 판본들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신장판' 혹은 '청소년판'이라며 교묘하게 비껴가며 기존의 판본을 일체의 수정없이 새로 찍어낸 경우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고(유유백서, 골때리는 연극부 등), 무삭제판이라며 이전 판본에서 수정했던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발매한 경우도 있었습니다.(드래곤볼) 이건 사실상 사기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죠.


이외에 원작과 무방한 판본을 발매하는 경우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장판과 고급형판본이 잠시간의 시차를 두고 발매되어 혼란을 빚은 경우도 있었고(드래곤볼, 로토의 문장), 원작자와 상의도 하지 않고 발매하였다 후에 문제가 되어 출간이 중단되어 버리는 판형(굿모닝 티처)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애장판을 발매했는데 정작 이후 일본에서 훨씬 우월한 판본을 발매하여 뒷목을 잡는 구매자들도 많았습니다.(시티헌터, 닥터스쿠르 등) 애초에 완결이 나지 않은 작품도 완전판으로 발매하는 일도 벌어졌죠.(프리스트, 라그나로크, 소마신화전기 등) 심지어 발매하다 판매량이 저조하자 출간을 중단한 사례도 있었습니다(마이러브).


이외 품질에서도 몇몇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표지의 질, 종의 질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제책 방식이었습니다. 좋은 종이질로 책을 출간해 본 경험이 적어서인지 책을 어느 정도 펼쳐서보다 보면 일반 판본보다도 금세 낙장되는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미스터 초밥왕)


구매를 목적으로 한 판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구매자들이 뿔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죠.


루팡3세Y같은 경우 루팡3세를 현대화시킨 리메이크 판본이지만, 이러한 복고 바람을 타고 와이드판형으로 국내에 정식 발매되었었습니다. 문제는 15권 완결 중 12권까지만 발매된 점.


여하튼 이것은 2000년대 초중반 서서히 일게 된 복고 지향성이 작용한 결과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중후반까지 경제 발전과 함께 최신의 것만을 쫓던 문화계가, 경제위기와 타개 그리고 정체기를 거치면서 옛 것에 대한 가치를 주목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고요. (...물론 당시의 제 나이를 고려할 필요도 있겠죠.)


실제로 당시 출간된 작품들의 목록을 보다보면, 마징가Z, 게타 로보, 마크로스, 에어리어88, 먹통X, 아기공룡 둘리 등 입이 떡 하니 벌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재미를 떠나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작품들이 대거 출간되었고, 당시 어느 정도 연령이 있던 마니아들은 환호를 질렀습니다. 애석하게도 당시 덕이 깊어가던 인터넷 키드들은 해당 작품의 가치를 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형편 없는 질의 책조차 권당 1만원은 가뿐하게 넘어서서 거래되고 있고요. 일례로 상기한 마징가Z나 게타 로보의 경우 그로부터 얼마 뒤 국내에 본격적으로 슈퍼로봇대전 붐이 일었기 때문에 구매 기회를 놓친 이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명작 만화의 복간은 또 이로부터 5~10년 정도 지난 후 본격적이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위의 불만들은 결국 불만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의 만화계는 한 번 구매할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소장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그 기회가 비록 만인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품질은 아닐 지언정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상황이었거든요.


당연하지만 이러한 고급화 판본은 만화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좋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화의 파급력, 재미를 이용한 입문서 내지 교양서로서의 가치가 강조되기 시작했죠. 이 시기를 거치며 베스트 셀러에 오르내리는 만화들의 숫자가 적지 않아졌고 굳이 만화의 팬이 아니더라도 "좋은 만화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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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