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 리는


오늘 날 코믹스 히어로들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들에 비견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작품 속 히어로들은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지고 그만의 여행을 떠나며, 그들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정한 교훈을 남기기도 하거든요. 그 가운데엔 "신성에 도전하지 마라"는 것과 같은 통용되지 않는 교훈도 있습니다만, 사랑이나 신뢰 등 만고불변한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신화 속 영웅과 지금의 만화 속 히어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존재입니다. 즉, 그들의 대표성과 정체성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은 신들의 자손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반신적인 존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진리나 질서에 도전하는 그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였고, 태반이 신성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비교의 대상은 신이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인간의 대표자로서의 자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오늘 날 코믹스 속의 히어로들의 대교대상은 대중 혹은 국민에 국한됩니다. 해당 작품 속에서 신과 같은 존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들 태반은 맞수 등으로 등장하곤 하죠. 결과적으로 코믹스의 히어로는 일반인보다 우월하기만한 존재로 그려지며, 그들이 가진 선천적 후천적 요소들과 맞물리며 인간을 대표하지만, 정작 대표할 자격이 없는 이들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슈퍼히어로에게 우리들을 보호해달라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대표성, 히어로만의 성질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범 대중적인 미디어믹스화되는 것은 80년대부터였고, 그것을 온전히 기술력으로 영상화할 수 있는 것은 2000년대 들어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히어로 콘텐츠는 개별의 장르들을 각각 녹여낼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영웅. 소수. 차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한 데 어우러진 작품이 있습니다. 예. 두 말할 것 없이 엑스맨입니다. 동성연애와 장애를 독특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로 치환시켜 표현한 이 작품은 히어로 장르에 '다양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지를 입증하였고, 결과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엑스맨을 원작으로 한 브라이언 싱어의 2000년 개봉작 엑스맨은 소수자에 대한 은유를 품으며,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울버린과, 주변에 상처를 입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로그 사이에 교감은 "세상을 구하여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의 최소단위가 "전지구적 단위로 치고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였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엑스맨은 '히어로물'이라기보단 '능력자물'에 더 가까운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돌연변이끼리의 대결'을 넘어 '인간과 돌연변이의 대결'로 귀결된 속편에서 더욱 분명하게 부각됩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은 전통적인 엑스맨과 차이가 있는 별개의 콘텐츠로 그만의 완성도를 통해 자리잡았다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98년 블레이드를 감상한 이들은, 특유의 세기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B급 정서를 기반으로 제작된 호러 액션에 대해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습니다. 일찍이 스파이더맨 TAS를 통해 국내에서도 모습을 들어내기도 했던, 반半뱀파이어이자 반反뱀파이어기도 한 블레이드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2002년. 블레이드의 속편을 맡은 길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를 이전의 뱀파이어 헌터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화로 변모시켰습니다. 체제에 의한 두 희생자의 대립은 선택과 외면으로 인해 뒤집힌 존재들에 대한 변주곡으로 완성되었고, 특유의 기괴한 분위기는 때론 신화적이기까지한 이야기와도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관객들을 매혹시켰습니다. 이러한 무게감은 블레이드2를 가장 인상적인 흡혈귀 영화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만들어 주었죠.


블레이드2는 블레이드의 액션성이 강조되며,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선 고뇌를 다뤘던 블레이드1과는 다른 지점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노막과 니사는 블레이드조차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존재들로, 악당들의 이상향이면서도 그들을 거부한 블레이드의 입체적인 성격에 대한 부각과 함께, 어째서 히어로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씩의 답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스파이더맨이 개봉하여 '고전이 아닌' 새로운 슈퍼 히어로의 정석을 구축하고, 스파이더맨2가 그러한 슈퍼히어로 콘텐츠의 가능성을 입증했다면, 블레이드 시리즈와 X맨은 슈퍼 히어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별개의 매력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이안의 헐크는 비록 상업적인 면에서 실패했을지언정 히어로 콘텐츠가 가질 수 있는 신화적 예술성을 증명했죠.


이 시기 여전히 엘렉트라나 캣우먼, 고스트라이더, 데어데블 등 상대적으로 편의적 클리셰에 기댄 채 휘발적 오락성에 치중한 콘텐츠들이 계속해서 제작되고 개봉하였습니다만 히어로 콘텐츠의 가능성은 이처럼 점점 넓고 깊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의 첫걸음인 배트맨 비긴즈, 신화가 되어 버린 고전의 완벽한 복각이라 할 수 있는 슈퍼맨 리턴즈가 개봉하게 되죠.


...언제나 처럼 1, 2년 왔다갔다 합니다.

신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