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박명


세기말. 갑작스럽게 아름다워지는 병이 여학생들 사이에 퍼지게 됩니다. 의학적으로 제대로 된 원인을 확인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아름다워진 여학생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는데 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세번째 주 금요일밤 같은 나이의 건강한 여자아이를 죽이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薄命





세기말 특유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세기동안 쌓아온 것이 붕괴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신세기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회오리치며, 특유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기 형성되죠. 실제로 슬리피할로우, 세기말 등 이러한 분위기를 매체화시킨 작품들도 적잖습니다. 이토 준지의 미인박명은 이러한 세기말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기말이 세기말이라고 불리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흔히 '잭 더 리퍼'일 것이고, 한국에서는 IMF가.... 슬리피 할로우는 연쇄살인사건이란 과학적 논지와 마녀라는 소재를 뒤섞어 기괴한 분위기로 세기말을 묘사했습니다.


김창완이 DJ이던 시절의 일화를 작품화한 스물살까지 살고 싶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가 자신이 어른이 될 때까지라도 살고 싶다는 절박한 표현이었죠. 하지만 이 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기말 즈음해서 별개의 의미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성장이 끝나는 시점부터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여기는 관점이죠. 인간의 삶- 특히 성인의 삶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며 열정의 소화이며, 신념의 변질입니다. 인간사의 풍파에 찌든 어른의 모습이라는 것이 때론 청소년들에겐 너무나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죠. 반면 인간사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나이는 사실 10대로도 충분히 달성가능합니다. 그러니 놀 건 스무살때까지 다 놀고, 그 이후는 모르겠다는 식의 발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죠.


이 작품에는 이러한 중의적인 의미가 모두 적용되어 있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미인으로 살고프다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앞으로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반문하고 있기도 하죠.





건강미라는 표현이 있고, 단순히 마른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화제가 되는 일도 잦죠. 그러나, 여전히, 마름을 아름다움으로 등치시키는 시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결국 확장하는 미디어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죠.


특히 일본은 한국보다도 '마름'에 대해 이러한 관념이 심해서 해외에서는 비교적 무던한 남성까지도 이러한 관점이 적용되기도 하고, 여성이 운동을 통해 복근을 만든다는 것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병적인 파리함- 결핵을 미인병이라고도 부르기도 했었죠.


사실 건강과 아름다움을 교환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다이어트에서 t를 줄였더니 Die가 되더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특정한 미적 만족을 위해 건강을 해쳐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성형수술이 보편화되면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전문의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받는 이들의 숫자 역시 늘어만 갔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첫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느 정도 건강미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성형수술을 통해 의해 만들어지는 부자연스럽거나, 지극히 보편적인 미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전만큼 열광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아름다움의 기준의 변화일 뿐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의 변화는 아닙니다.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된 서든어택2. 경쟁작인 오버워치와의 비교는 정말 지긋지긋 할 겁니다만. 물론 오버워치 역시 마르고 글래머러스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캐릭터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캐릭터들도 존재하죠. 오직 바비인형만으로 구성된 서든어택2와는 달랐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게임 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희소함에서 비롯됩니다. 어두운 피부가 당연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미인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밝은 피부이고, 실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것이 당연한 시대에 미인의 조건은 햇볓에 노출되지 않은 창백한 피부이며,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 저체중이 되는 것보다 과체중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시절엔 통통한 것이 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과연 건강을 해치는 것과 나란히 놓아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못생긴 것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더 더욱. 한 떨기 스러질 꽃잎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그 뿐이라는 겁니다. 동시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플러스사이즈 모델을 마르게 이미지 변조하여 자사의 홍보에 써먹는 일, 태반캡슐 등등등...- 역시 긍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요.


결국 못생긴 채 끝까지 살아남은 아야코는 아름다움을 동경했을지언정, 그것을 억지로 닮아가려 하지 않았고 아름다움과 삶 둘 모두를 갖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신세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겠죠.





개인적으로는, 본 에피소드가 이토 준지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이기는 합니다만, 기괴한 느낌은 반절로 줄이고, 세기말을 양념으로 쳤기에 타인에게 저만큼 인상적이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데 신세기를 살아가지 못하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갖기 못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부각되지 않아 단순히 분위기를 형성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사용된 클리셰는 세기말 세계의 변혁 앞에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 불거지는 사건, 그리고 타인을 해치면 자신의 삶이 연장된다는 미신 등입니다. 이야기적 분위기가 독특한 덕에 클리셰가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세기말이 가진 의미속에는 물질주의적이고, 퇴폐적인 무언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실제로 그 즈음해서 나온 콘텐츠들을 보면, 어떤 의미에선 2010년대 중반을 넘어간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미래지향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죠. 농담 아니라 저 기세가 유지되었다면 매드맥스나 북두신권이 현 시점에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에피소드를 꽤나 좋아합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들, 너무나 소소하지만 앞으로 살고싶다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들이 호러라는 본연의 정신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기말을 인상깊게 보낸 세대의 감상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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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