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서두는 글을 대략적으로 짜둔 후 작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과 만화 '한국적인 것'은 세번의 포스트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첫번째는 왜 한국적인 것에 추구하게 되었으며 왜 그것이 허상이었는지,

두번째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국적인 것과 실제한국적인 것 사이의 괴리를 다루며,

그리고 세번째로 그 논의 과정의 결과가 흐지부지되었음을 다룰 것입니다.


본래는 한 포스트 내에서 모두 다룰 생각이었습니다만,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졌습니다. 워낙 본 포스트를 오랜만에 진행하는지라 과거에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는지도 혼란스러워서... 그리고 좀 더 나중의 일로, 한국적 라이트노벨에 대한 담론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며, 한국적 판타지, 한국적 만화의 이야기로 마무리짓겠습니다.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


원어민인 미국인보다 한국인들의 토익 테스트의 점수가 더욱 높아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영어를 정말 잘 하는 줄 안다는 농담이 나돌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위해 훈련된 테크닉과 언문학적으로 체계화된 교육 덕에 점수 자체는 높게 따지만, 그것이 결코 영어라는 언어를 원어민보다 더 잘한다는 지표는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토록 잘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점수와 같은 객관적인 지표조차 현실을 나타내는데에 분명한 한계점을 가진다는 겁니다.


 사실 낯선 일이 아닙니다. 90년대에도, 그리고 2010년대에도 비슷한 논쟁이 터져나왔으니까요. 예컨데 90년대의 한국적 판타지 논쟁, 2010년대의 한국적 라이트노벨 논쟁이 사실상 이러한 궤를 같이합니다.


 이러한 논쟁이 불거지게 된 것은 이전의 포스트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타인(외국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더불어, 한국인 스스로가 한국을 대표할만한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적인 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엄격하게 대하는 태도가 문제되기도 했고, 한국인 스스로가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단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펼쳐진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한국인들이 설명하는 한국적인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뭔가 이질적인 것은 구분해 낼 정도의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습니다. 민족주의적 교육을 통해 이러한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상생활에서의 편의성을 뛰어넘는 수준은 아닙니다. 거기다 한국의 전통 문화임에도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이야기할 정도로 혼재된 현대사회를 살고 있기에 그 구분은 갈 수록 투미해지면서도 그에 대한 태도는 엄격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면서도, 사회 일부는 한국이 신생국가에 가깝다 여기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요성은 강조하는데 정작 역사교육은 점점 뒤안길로 밀려납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지역적인 분단과 역사적인 단절과 맞물리고, 또한 해외 문화의 여러 영향을 크게 받게 되면서-


한국인 스스로도 무엇이 한국적인지, 왜 그것이 한국적인 것인지 제대로 설명해내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문화에 대한 요구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뭐가 한국적인가,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가. 애초에 왜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는가... 등등 말입니다.





이전 시대의 음악가들에게 있어 중요했던 것은 해외의 장르를 한국으로 이식하고 그것을 한국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식은 당시에 여러 이견을 낳았습니다. 모티브가 되는 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현하는가가 음악성의 척도가 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한국식은 당시 세련되지 못하고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의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해외의 음악을 직접 체감하고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는 뮤지션들도 적잖고, 애초에 해외의 교민이 직접 해당 음악을 수입해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소녀시대에 완전히 밀리다시피한 원더걸스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달랐습니다. 호기롭게 미국진출을 외칠 수 있을 정도로요.


 하지만 그 원더걸스의 미국진출기에서 '한국적'은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여러 현상 속에서 부정되는 것을 대중들도 인식했기에 특별한 논쟁이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이전같으면 해외진출하는 한국 뮤지션에 국가주의적인 색체를 뒤집어씌우기도 했지만, 이미 그 시기는 완전히 지나버렸죠.


 한국식 기준에 맞추는 것도, 그렇다고 미국식 기준에 무조건적으로 맞추는 것도 문화의 우열식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는 거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결국 90년대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이 재평가의 붐을 타고 신중현, 조용필, 산울림 등이 새롭게 음악적으로 조명되었었죠.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적인 것'의 요구가 강해지게 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통해 단일민족이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한국인만을 상징하는 것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한국적인 것의 '승화'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죠. 외국에서 들어왔지만, 한국식 이식을 통해 보다 나아졌다는 발상을 하게 된 겁니다. 실제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중반 록과 댄스, 힙합 장르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을 녹여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엔 그 가운데 넥스트 등처럼 유의미한 성과를 남겼다며 평가받는 이들도 생겨났죠. 특히 넥스트와 같은 경우엔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런 매커니즘이죠. "미국에서 록음악이 한국으로 들여져 왔다→한국에서 미국식 록 음악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다→한국식 록음악이 미국으로 진출한다→미국에서 접하기 힘든 음악은 새롭고 대중적으로 히트한다→그러므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의 태반은 당대의 유행이나 시도 그 자체에 의의가 있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한국식으로 승화된 음악을, 다시 음악의 태생지 그것도 주류 음악계에 진출시켜 큰 성공을 거둔다는 이야기는 희망사항이라기보단 망상에 가까운,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처럼 여겨졌죠.


2000년대 중반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이끌고 미국에 진출하겠다 선언하기 전까지는.






당시 박진영의 입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네요. 지금이야 여러 구설수와 원더걸스 등의 미국 진출의 실패 등으로 인해 이전만 못하게 평가되고 있지만, 이 당시의 박진영은 달랐습니다. 국내에서 가수로서, 프로듀서로서, 기획사 사장으로서 거둘 수 있는 성공은 다 거둔 상태였던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는 국내 원톱의 위치라고 평가받으며 더 올라갈 곳이 없다 이야기되던 원더걸스를 첨병으로 내세워 미국진출까지 선언했죠. 그 평가는 더더욱 높아졌음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실제로 이미 윌 스미스 등에게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주어 음반에 실리게 하기까지 했죠.


그의 행보가 특히 더 주목받았던 것이 R&B의 본토에 한국인이 한국에서 만든 R&B를 들고가는 것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과연 한국의 문화가 미국에 먹힐 것인가, 그리고 문화의 상하관계가 역전될 것인가 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의 행보는 앞서의 그것과 같았고, 그것은 분명히 저를 포함하여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우리가 팝송을 듣는 이유는 그것이 이국적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좋고 나쁨의 메커니즘을 거친 결과였고, 문화 그 자체엔 그 상대성으로 인하여 특별한 상하관계가 존재치도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개개인의 취향에서 존재하는 세계화된 기준을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공감치 못한다는 것은 아집과 독선에 잠긴 선민의식과도 닮아 있음을요.


놀러와였나요... 무릎팍도사였나요. 게스트로 나온 박진영이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정확하게 워딩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그러했다고 참고해 주세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R&B에 민요도 삽입해보고 꽹과리도 넣어보기도 하고... 근데 아니다. 어울리지 않았다. 대중문화가 대중에게 외면받으면 말짱 꽝이다. 결국 원조의 스타일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라고요.즉,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것이라는 발언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실제로 민주정권이 들어서며 해외와의 교류가 본격화되었고, 팝송이 가요시장에 완전히 자리를 내어주는 등의 일이 벌어졌기에, 위와 같은 발언은 이미 현상으로 부정되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습니다. 복합적인 입지를 가진 박진영의 말은 결국 일종의 확인사살과 같은 개념이었던 거죠. 결국 우리는 정답처럼 이야기되던 '한국적'에 대한 태도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한국적인 것이 무엇일까. 과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맞는 것일까. 그 한국적인 것을 정작 우리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리고 세계화된 기준과 한국인의 기준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괴리되어 있는 것일까... 라면서 말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히 한국적인 소재를 우겨넣는 것을 '한국적'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되려 구체성 없이 끊임없이 한국적을 읊조리는 것에 대해 반발하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정도로요.


결과적으로 박진영은 실패했지만,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전제를 부수는 데 이런 저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접하는 해외의 이국적인 것들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외국의 여러 콘텐츠를 즐기고 열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해외의 영화, 만화, 음악 등이 단순히 새로워서 우리가 좋아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사회는 이미 상당히 서구화되어 글로벌리즘이 중요한 사회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해외의 콘텐츠를 영화나 비디오 등으로 꾸준히 접해올 수 있었고,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단순히 새롭기 때문에 열광한다고 표현하기엔 한국은 너무나 많은 부분이 세계화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한복이 아닌 청바지를 입는 것은 단순히 편리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이국적이기 때문이 아님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두번째는 흔히 이야기하는 이국적 콘텐츠들이 일정한 정제과정을 거친 이후의 작품들이라는 겁니다. 단순히 이국적인 것들이라고 일반화하기엔 쏟아지는 콘텐츠의 양이 엄청나게 많을 뿐더러, 작품성 내지 수익성을 담보로 해외에 수출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이국적이라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론은 결국 하나입니다. 상대방-그러니까 한국의 문화를 수입해서 즐겨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인 가치와 취향의 문제이지 한국적인지 아닌지 는 아니라고요. 잘만들고 재밌어서이지 한국적이어서는 아니라는 답이 자연스럽게 내려지는 겁니다.


그러한 구분은 일괄적일 수도 없고, 한국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정말 한국적인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가부가 작품성 그 자체를 가를 수도 없고요. 물론 크고 작은 지역색은 여전히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이조차 200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개성에 머무르는 수준이 되었죠.





결국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믿음 자체는 산산히 깨어졌습니다. 소재만으로 모든 걸 차별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시장이라는 것이 얄팍하지도 않았고요. 즉 현상으로 깨어진 이론이라는 겁니다.


외국에선 김치가 건강식이고, 한국식 건축물이 세계에서 사랑받고, 전통복이 찬사를 받고, 한글이 인정받고...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이 현상으로 깨어진 겁니다. 면전에서 좋은 거라고 내놓은 것을 매몰차게 차버릴 수가 없는데, 그걸 가지고 침소봉대하는 것에 본격적인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소리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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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