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글에서 한국적을 우리가 쉽사리 정의내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인 특수성과 이러한 역사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분위기가 작용하여 그 결론을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만이 우리가 한국적을 정의내리는 것에 대한 유일한 장해일까요? 지난 시간 저는 그렇지 않다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이유 가운데 또 하나인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자. 이제 지난 시간에서 이야기한 관념에서 자유로워져 봅시다. 성씨나 지역, 그리고 지지하는 정당이나 이념을 떠올리지도 말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이야기해봅시다.


늦잠을 자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급하게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 그러다 그 날 전학온 학생과 부딪혀 빵을 떨어뜨립니다.


에반게리온의 식빵 역시 이러한 클리셰를 활용한 대표적인 작품군이죠. 흥미로운 것은 팬층에서 만든 2차창작물에서 보여주었던 연출이 이후 본편에 삽입된 케이스라는 겁니다. 


익숙하시죠? 하나의 클리셰가 된 연출로, 원산지격인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식빵과 지각으로 검색해보세요. 온갖 작품의 온갖 캐릭터들이 장르와 시대를 불문하고 식빵을 물고 달려 가고 있습니다.


자. 이제 묻겠습니다. 저 장면은 한국적입니까? 일본적입니까? 아니면 그 외의 나라의 성향이 강한 장면입니까? 당연히 일본에서 비롯된 연출이니만큼 일본적인 장면 아니냐고요?


그럼 질문을 다시 바꾸어 볼까요. 빵이 일본적인 것입니까? 교복을 입는 나라는 오직 일본 뿐인가요? 학생이 학교에 늦는 것은 또 어떤가요? 누군가와 부딪히는 장면은? 지각하여 빵을 우물거리며 학교에 가는 장면은 잠을 줄여가면서도 학업을 쫓는 고등학생에겐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저 일련의 과정이 일본에선 일상적인가요? 자. 다시 물어볼게요. 저 장면은 한국적입니까, 일본적입니까?


어떻습니까. 뭔가 혼란스러워지죠?


오늘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흔히 한국 작품과 일본 작품의 연출을 비교할 때, 일본 작품은 타인이 자신 모르게 하는 이야기에 대해 재채기를 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귀가 간지럽다 표현하곤 합니다. 하지만 양자는 그 표현방식의 차이일 뿐,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 표현의 방식만이 한국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가 될까요?


문화적인 측면에서 한국적인 것과 한국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란, 문화의 성질 세 가지에 의해 이토록이나 어렵다는 겁니다. 이 문화의 성질은 크게 파급성, 가변성, 보편성 정도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이 세 기준은 다만 관점을 달리 할 뿐 어찌보자면 동어반복이라고도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내용은 다른 내용을 설명하고, 어떤 내용은 다른 내용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만화만이 아니라 문화의 보편적인 특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언젠가의 교양시간에서 들었던 내용과 비슷하기도 하네요.




 문화의 확장, 기준의 공존.


흔히 문화는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제국주의 시절 미국과 유럽 등의 문화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것이 피지배국가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당장 한국만 해도 독일과 일본에서 건너온 헌법에, 미국에서 건너온 선거방식을 채택하고 있죠. 이 법들이 한국인들의 의식과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거창하게 헌법을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당장 TV를 켜 보세요. 당장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에 접속해보세요. 당장 가장 즐겨하는 게임을 살펴보세요. 헐리우드의 영화와 드라마를 24시간 방영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실상 리얼타임으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제조사나 관련 프로그램들은 또 어떤가요. 크롬이건 익스플로어, 폭스건 외국에서 만든 브라우저이긴 다르지 않습니다. 게임은요? 블리자드와 라이엇 게임즈에서 만든 게임들이 PC방에서 과반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콘솔 게임은 미국과 일본에서 만든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고요.


창작물에는 자연스레 작성자의 정서와 관념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매체에는 필연적으로 제작자와 이용자가 공유하는 직관성을 최대화하기 위한 정제된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고 있고요. 자연스럽게 이것을 이용하는 국내의 이용자들은 위와 같은 정서와 직관성을 체득하게 됩니다. 문화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죠.


기술의 발전에 따라 문화가 퍼지기 쉬워진 상태이고, 한국은 이러한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보니 한국적을 쉽사리 정의내리지 못하는 것, 이라고 우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한 것이 현실입니다.


아주 조악한 예지만, 젓가락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전방위로 외국의 문화가 한국에 흘러나오는 상황인데 어째서 한국은 젓가락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을까요? 음식문화가 크게 바뀐 이 현실속에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괴리가 커서라고 말하기에도 곤란합니다. 일본과 중국의 문화도 계속해서 한국에 유입되고 있는데 이들의 젓가락 문화가 특별히 한국의 젓가락 문화를 바꾸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거니까요.


이 장면은 한국적인가요? 미국적인가요? 중국적인가요? 그 기준에 따라 제각각인 답변이 나올 겁니다. 만화라는 장르에 얼마나 익숙하느냐에 따라 일본 작품 속의 한 장면에 대해서도 제각각인 답변이 나올거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여기엔 마찬가지로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의 변화- 상기에서의 법과 같이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가 문화의 세세한 변화까지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애초에 모든 사람들에겐 새로운 것을 쫓는 반면,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자 하는 면이 공존하니까요. 세번째는 문화의 흐름이라는 것이 늘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찾아가는 흐름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가진 인식이나 미적인 감각 등은 결국 제한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술적, 시기적으로는 뒤로 거스르는 일일지언정 과거로 지향하는 일이 문화에서는 발생하기도 합니다. 복고가 유행인 것이 대표적인 예죠.


이 세가지 이야기는 결국 하나를 가르킵니다. 문화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애초에 문화엔 높낮이란 존재치 않으며, 여러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주류가 되고, 때론 비주류가 되며, 그 관계가 시간에 따라 뒤집히기도 합니다. 문화는 여러 요인에 따라 변화하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이란 존재치 않습니다. 상호영향을 주는 과정에서, 새로운 쪽이 기존의 문화와 결합하고 변화하여 사실상 별개의 문화가 되죠. 그렇다면 한국적의 기준은 어디가 되어야 하나요? 외부의 요인이 들어오기 전? 외부의 요인이 들어와 변화하는 과정 중의?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결합하여 자리잡은 상황을? 단언하기 힘듭니다.


강의에 나가면서 청바지를 입고 교통카드를 긁으며 애플사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합니다. 한국 특유의 교통 시스템을 이용하는 모습이지만 동시에 청바지와 스마트폰이라는 외국에서 유래한 소재가 등장하죠. 이것을 한국적인 광경이라 볼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위 장면이 한국의 어디선가에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는 여러 측면에 영향을 받고, 한 사람이 가진 관념 속에서도 제각각인 기준을 갖게됩니다. 의복에서는 서구식이지만, 식생활에서는 한국식인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복합성으로 인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단언하기가 힘든 겁니다. 문화는 끊임없이 흐르니까요.




 문화의 변화. 경계의 흐려짐


자. 이제 문화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상단의 문항에서는 문화의 지리에 따른 차이와 그로 인한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의 변화의 요인에는 지리적인 차이 외에도 여러 요소들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살펴봐도 시간의 흐름과 입장의 변화, 기술의 발전 등의 사유가 작용하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예로는 특정한 예절을 수행함에 있어 존재하는 간결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연단위로 수행해야 했던 장례절차나 아침저녁으로 반복해야 하는 문안인사 등은 이제 더 이상 지켜지는 문화현상이 아닙니다. 세대와 입장의 변화로 인한 예는 지역별 거주 인구와 사회구성원의 연령대비 비율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령층 인구가 많아질 수록 그들에 대한 사회적인 대우는 정책적인 차이에서 변화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관련된 문화에 반영됩니다.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역시 기술의 변화입니다. 이른 바 지구촌 사회의 개막을 통해 공통의 잣대가 인류 전반에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결코 침해되어서는 안되는 보편적인 권리가 세계를 운영하는 원리에 영향을 끼치게 됨을 의미했죠.


이러한 변화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선택지는 효율성일 겁니다. 이러한 효율성은 필연적으로 제한된 형태로 귀결되기에 이르죠. 과거 중국에서 의복을 비단으로 만들고, 중세유럽에서 리넨으로 의복을 만드는 등의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합성섬유로 의복을 만드는 것이 주류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 취향, 콘셉트 등이 어우러지며, 중국에서 만든 서양식 복식, 영국에서 만든 중국식 복식까지 나타나기에 이릅니다.


즉, 한국적이냐 한국적이지 않느냐와 같은 국적성의 기준은 시간이 갈수록 그 구분의 기준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상단의 빵을 먹으며 등교하는 것도, 스마트폰을 쓰면서 걸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특별히 국적이나 성격을 부여하기 곤란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흔히 미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만, 그 미국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 불림을 생각해보면 결국 그 경계라는 것은 단어 하나로 정의내릴 수 있을 만큼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짜장면은 한국적입니까, 중국적입니까? 한국인은 이것을 중국음식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제로 그 조리법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는 해당 음식이 존재치 않고, 중국인들은 지극히 한국적인 맛이라며 꺼리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기준은 이렇게 흐려져 버립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불분명한 경계의 문화속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한국적이라는 기준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당장 그 스스로가 느끼는 고유의 한국적이라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확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문화의 대체적인 흐름이 반영되는 창작물 이 한국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적이라는 거죠. 작품의 소재를 역사의 그것으로 한정하더라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이 현대인이라는 입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관념 자체는 작품에 깃들고, 이것이 결국 작품의 한국적 논란을 이어지게 하는 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문화의 보편성. 공통점과 차이점


자. 근본적인 영역으로 돌아와봅시다. 어떤 문화는 어떤 문화보다 빨리 퍼지고, 또 어떤 문화는 기존의 문화를 대체하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변화되어 새로운 것으로 정착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상단에서는 '효율성'이 기준이 되어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설명했습니다만 사실 그 뿐만은 아닙니다. 과거로 역행하는 문화의 흐름처럼 때론 문화의 변화라는 것은 효율성만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거죠. 결국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좋다'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넓게 분류하면 대략적으로 합치하는 면이 존재하는 반면, 그 세세한 차이에서 불거지는 이질감이 서로를 구분짓는 경계선을 형성한다는 거죠. 예컨데 미국식 개인주의와 한국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어른에 대한 공경을 이야기하곤 합니다만, 사실 나이든 이들에 대한 존중의 태도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다만 세세한 차이가 있어 그 차이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 뿐이죠. 이 세세한 차이가 바로 '한국적'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UFO마니아이자 오컬트 신봉자 남자와 그런 것들에 학을 떼지만 정작 영감이 있어 귀신 등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빨간머리 여자는 한국적입니까 일본적입니까? 저는 여기에 일본적 미국적 한국적이라고 모두 답할 수 있습니다. X파일의 멀더와 스컬리, 케로로 하사의 히나타 남매가 공유하는 성질은 결국, 문화의 향유자가 공유하는 보편성을 노린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문화가 가지는 보편성 덕분에 문화가 퍼져나가는 것이며, 이러한 보편성에 포함되지 않는 하위의 영역이 때론 문화가 더욱 빨리 전파되거나 혹은 바뀌거나, 혹은 전파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상기의 식빵을 먹으며 등교하는 장면은 한국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일본적이기도 합니다. 양국은 문화적으로 많은 면-치열한 교육환경, 서구화되어 가는 동양식 식습관, 교복 등-을 공유하고 있으니 필연적으로 비슷한 장면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교복이 존재치 않는 국가에는 이국적인 광경이 될 것이고, 통신교육이 활성화된 국가나 어지간해서는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지 않는 문화권의 이들에게도 생경한 모습이 될 겁니다.


결국 한국적이냐 아니느냐는 작품 자체가 퍼져나가는 것이 극도로 쉬워진 이 시점에서, 결국 각론간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본질적인 차이가 아닌 익숙함으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결국 이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항목과 이어집니다. 어디나 사람이 사는 곳이고, 문화는 서로 퍼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합치되는 면을 나타내보인다는 것이죠.




 결국


문화 자체가 여러 요인으로 계속해서 혼재되고, 비교적 분명한 관점을 잡아내더라도 그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고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에 대해 순수성만을 찾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삶과 괴리될 수밖에 없고요. 대중문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작품에 있어 한국적인 것을 꾸준히 찾는 과정에서 독창성 형성에 도움은 줄 수 있겠지만, 생활과 지나치게 멀어지는 것은- 예. 곤란하다는 겁니다. 대중작품이잖아요.


대표적으로 사극의 경우. 고증은 중요한 평가요소지만 결코 유일한 평가요소는 아닙니다. 여러모로 협상의 대상이 되고,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100% 과거와 동일하게 할 수도 없거니와, 이 과정에서 대중성과 괴리되면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배우에게 과거 인물들의 말투와 행동까지 그대로 행하도록 하면 자연스레 전달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한국적을 판단할 제3자에게 한국적이라고 평가되는 요소로 될 것이냐도 의문이며, 그것을 떠나 작품성을 높이는 요소가 되지도 않고요.


그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결국 고민과 공부입니다. 무엇이 문화의 보편성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서도 독창성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차별적인 요인을 어떻게 나타내어 한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자. 이렇게 아흔번째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91번째 내 인생과 만화는 생활에서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공부가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문화계에 바라는 한국적이라는 것과 생활상에서의 한국적인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죠.

신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