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토 준지 시리즈 리뷰에서 '기괴하다'고 표현했었는데, 기괴하기로 따지자면 '탈피'도 뒤지지 않습니다. 지난 머리없는 조각상과 달리 이번 탈피는 호러물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들을 대거 차용하면서도, 이러한 조합을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창작물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특유의 활기와 독창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호러적인, 이야기적인 완성도만 따지자면 이토 준지 공포만화 악령의 머리카락 1권에 수록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이야기적인 밀도 역시 가장 충실하고요.


이 에피소드에 주목할 만한 점은, 아름다워지는 것에 대해 무던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요소들을 상대적으로 자주 엮이지 않는 소재들을 활용하여 이야기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연금술, 바바리맨, 무서운 아이 등의 소재를 엮어내며 이야기의 동력을 잃지 않고 진행해내며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끊임없이 자아냅니다. 실제로 본 작의 등장인물들 모두를 주인공으로 그만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탈피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모모코는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누군가가 뿌린 끈적끈적한 액체를 뒤집어 쓴 후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카락까지 자르게 됩니다.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누군가를 찾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유치원에서 다른 원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뜯어내는 것이 익숙한 치카라로 인해 골머리를 앓습니다. 치카라의 가족을 찾아 상담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모모코는 치카라의 집이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립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다며 자신을 따라오는 치카라의 피부가 매우 얇아진 상태임을 알게된 모모코는, 이후 자신에게 끈적끈적한 물질을 뿌린 사람을 잡아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얼마 전 만난 치카라의 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치카라의 집안의 비밀과 마주하게 됩니다.


 탈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원제는 肉色の怪이고, 영미에서는 Flesh-Colored Horror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살색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제목으로 Tales of Crypt의 한 에피소드가 국내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한 제목은 아닌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쉽게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제각각인 이야기들이 저마다 질주하며 끝에서 어우러지게 됩니다.






본편에 쓰인 클리셰들은 마찬가지로 크게 다섯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체실험 자체는 단순히 약물을 통해 변화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좀 더 극단적으로 가면 인체개조라는 소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경성학교는 전자에 가깝고, 직접적으로 인체를 부품의 하나로 전락시킨 인체개조까진 나아가지는 않은 작품에 해당합니다.


첫번째. 인체실험. 본 클리셰는 현실상의 성형수술, 의료 시술과 맥을 같이 합니다. 국제법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의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신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보존되어야 하는 절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후의 전쟁 등의 상황에서조차 국제법에 따라 각국에 시신을 인도토록 보장하고 있기도 하죠. 인간, 특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절대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예로 명시되어, 인체실험은 지극히 제한된 조건하에서 이뤄지도록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예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소리기도 하죠. 2차대전에서의 나치 독일과 일제는 살아있는 인간을 인체실험의 대상으로 사용하여 각국의 지탄을 받았었으며, 보다 나아지는 사회를 위해 이러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약속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실제로 이에 대해 합의하기도 하였죠. 과거 존재했던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인간은 인체실험에 대해 설사 칼을 대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도 극히 커다란 거부감을 갖도록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본작은 이러한 인체실험을 우리가 보편적으로 행하는 성형시술 등과 나란히 놓도록 만듭니다. 분명 보다 적을 효율좋게 제거하기 위해 인체실험을 행하는 전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보다 보편적인 가치- 예컨데 생명을 위한 인체실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체실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피해와 그로 인해 혜택을 입는 사람들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윤리적 논란이 일고 있으며, 특히 단순한 미용을 위해서도 이러한 인체실험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이의가 제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을 건드리며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그 보편적 가치가 어떻든, 자신이 약자건 혹은 몸이 아프건, 혹은 지인이 고통을 겪고 있건 등의 이유로 어딘가에선 인체실험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 에피소드만의 독특한 점은, 이러한 인체실험 내지 인체개조는 프랑켄슈타인 이래로 보통 현대적인 의료과정을 통한 연구윤리와 나란히 놓는 것으 보통인데, 중세의 연금술을 주된 소재로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또한 프로 연구인으로서의 책임이나 윤리관이 아니라, 막연히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아마추어를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 역시 공포를 위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러 호러물은 초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임을 내세웁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게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두번째 편집증. 자신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편집증이 두번째 소재로 활용됩니다. 본작에서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은 치카라와 그의 엄마입니다. 잡아뜨는 것이 첫번째고, 두번째는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 매달리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치카라는 그의 엄마의 행동에 대상이 되면서 전자를 습득하였습니다. 치카라의 엄마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계속해서 매달리며 양자를 갖게 되었고요. 이 과정은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되어 주고, 동시에 왜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지에 대한 지표로 작용합니다.


세번째. 무서운 아이. 언젠가의 클리셰 이야기에서 무서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토록 하겠습니다.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지만, 그 아이 역시 엄연히 악독한 일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죠. 하지만 본작은 단순히 무서운 아이를 내세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왜 그 아이가 무섭게 되었는지를 다룹니다. 즉, 본 작에서의 무서운 아이란 이야기에 흥미를 자아내는 소재이며 중심은 아니라는 겁니다. 즉, 무서운 아이라는 클리셰는 학대받은 아이라는 또 다른 클리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거죠.


네번째.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등치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의 악의는 인과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합리할 정도의 무작위적인 재앙과도 어느 정도 이어집니다. 본작에서 모든 악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치카라의 엄마는 일반인의 범주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정신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협력자라 할 수 있는 치카라의 이모, 그리고 어쨌든 모자관계인 치카라조차 그녀의 이러한 행보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러한 자신의 악의를 불특정의 대상에게 표출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주어 '깊은 산에서 마주치면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도 호랑이도 아닌 인간이다'라는 클리셰를 제대로 구현해냈습니다.


입찢어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바리에이션이 존재합니다. 그 여러 바리에이션 중에 하나는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악의를 표출하는 것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것은 미적관점이 뒤틀려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들까지도 포함합니다.


다섯번째. 미에 대한 집착. 이는 바바리맨 등의 소재-자신의 아름다움을 강제적으로 타인에게 보여주려하는 클리셰-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가진 미에 대한 집착은 때론 이해하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가깝게는 잠잘 시간까지 줄여가며 피부 관리를 하는 이들에서부터 좀 더 나아가선 온갖 보형물을 자신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삽입하는 이들, 심지어는 타인의 생명과 신체를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활용하는 이까지 존재합니다. 이만으로도 공포스러운데, 이러한 미적 감각이 비틀려 있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한다면 공포의 감각은 더욱 확대됩니다. 실제로 이러한 클리셰를 잘 보여준 도시전설이 바로 입 찢어진 여자일 겁니다.





본 에피소드는 사실 어찌보자면 산만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거리가 가깝지 않은 여러 소재들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치카라나 치카라의 이모 둘 중에 하나는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주얼적인 측면을 따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치카라, 치카라의 이모, 치카라의 엄마는 익숙하지 못한 인간의 신체를 보여주는 여러 과정을 순차로 보여주는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비주얼이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 가진 위상을 생각해보면, 저런 이야기적인 산만함은 허용할 범위 내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피부로 감싸진 모습이 보통이고, 그것에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들은 커다란 이질감을 느끼게 되죠. 특히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제작상의 편의점만을 따진다면 뼈나 내장이 차라리 익숙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요. 이토 준지의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선 참 비인간적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너무 인간적이어서 거부감이 일기도 합니다. 작품에 묘사되는 측면들이 어쩌면 '우리'에게도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하기에 더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본 에피소드는 일종의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악몽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죠. 본 에피소드에 대한 감상은 상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공포였습니다. 주연이 관찰자로 제시되었다는한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이토 준지 시리즈 가운데 가장 괴이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알숑규의 만화이야기방은 만화저작권보호협의회에 등록하여 운영중인 사이트입니다. ...오랜만의 이토 준지 시리즈 리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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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