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에 메모하고 등록한 후 방치하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글을 이어 씁니다.


금일 다룰 클리셰는 평범한 물질이 이질적인 적의 약점이다라는 클리셰입니다. 이 클리셰는 톰 크루즈가 주연한 우주전쟁(세균),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주연한 에볼루션(샴푸의 성분), 멜 깁슨 주연의 싸인(나무)처럼 외계인이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겐 일상적으로 흔한 물질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무해하다는 소리인데,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소리니까요. 자연히 외계인으로 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외계인이 아닌 존재를 대상으로 해서도 얼마든지 해당 클리셰가 작동합니다. 악마라거나 마족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예컨데 아벨탐험대의 마왕 바라모스는 깨끗한 물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꼬비꼬비의 망태할아버지는 착한 아이의 오줌이 약점이었고요. 최초로 자연계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에넬은 고무가 약점이었습니다.


총칼로도 처치하지 못하던 적이 결국 또 다른 지구의 구성원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이것을 자칫 잘못다루면 모든 게 정해져 있었다느니 누군가의 가호를 받느니 하는 식으로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는 다양한 이야기의 구조를 완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클리셰는 보통 익숙한 주제와 합치될 때 비로소 편의성과 집중력을 갖추는데, '평범한 물질이 이질적인 적의 약점' 클리셰는 이 폭이 아주 넓습니다. 이야기적인 반전을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고,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출에서도 활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계도적인 측면에서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보통 이야기는 주인공의 주체적인 행동과 그를 뒷받침 하기 위한 노력, 그를 뛰어넘는 운과 불행 등이 불확정성을 더해주어 독자를 보다 매혹시키고 몰입시킵니다. 강력한 적은 이러한 주인공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통해 위기감을 고조시키죠.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은 강력한 적일 수록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설정하곤 합니다. 이것은 게임 밸런스적 발상이라 종종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편의성 측면도 작용한 결과입니다. 비중의 분산과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일례로 우주전쟁의 세균의 경우, 우주라는 넓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고, 그들끼리 작용하기에 오직 인간만이 우주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한다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사용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의 바라모스는 우리 모두 물을 깨끗하게 사용해서 그를 통해 마왕을 물리치자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끌어왔습니다. 원피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주인공을 부각시키고 세계의 확대를 표현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끌어왔고요. 이 외에도 인간의 의지보단 우연이나 더 큰 무언가의 의도가 녹아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의 연출을 위해 위 클리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상속에서 흔히 놓치고 있는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로 소화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는 그만의 의미가 있다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요.


싸인은 하필이면 나무와 물이 약점입니다. 물이 표면의 70프로 이상인 지구에, 온갖 식물로 둘러져 있는 농장에서 저 둘이 약점인 외계인이 나오지 영화의 만듦새와는 상관없이 작위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죠.


엇비슷한 클리셰로는 아무 생각없이 갖고 있었던 물건이 사실 적에게 치명적인 물건이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주셨던 목걸이의 보석이 사실 적을 물리치는 보석이더라~ 생계를 위해 사고파는 마약이 사실 괴물을 물리치는 물질이었다더라(영화 패컬티)~ 등등 물건의 평범함이 작용하지 않거나 말 그대로 우연성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알고봤더니 적의 약점이더라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의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어찌되었건 이만큼물론 상당히 낡은 클리셰다보니 지금 와선 적잖게 비판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장 우주전쟁의 경우 "신체구성요소부터 다른 외계인에게 지구의 세균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당대 과학잡지에서 이야기되기도 했었고, 싸인은 "딴 건 다 웃고 넘기겠다. 근데 대기 중 수증기는?"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었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들도 일찍부터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저것이 주인공과 엮이고 주인공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은 후, 비로소 터져나온다는 것에 대해 작위적이라 비판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