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는


연출과 소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장르이고, 저작권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디어라는 특성과 함께 창작자 개인의 개성이 오롯이 반영되는 연출이 조합되곤 합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독특한 개성을 확립한 장르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무수한 아류작으로 이어지며 장르를 형성하는 수준까지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 집니다.


금일 다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날뛰는 사악한 존재들이라는 클리셰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공포영화는 이러한 틈에 위치하여 그것을 자극하기 위한 여러 소재와 연출을 이끌어 냈습니다. 처음에는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 어느 순간엔 존재 본연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로까지 번져갔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날뛰는 사악한 존재는 이러한 클리셰 전반에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포가 가진 보편적인 특성, 꺼리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금기에 대한 호기심에 더불어 자극을 쫓는 인간의 성질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인간이라는 소재를 메타적으로 다루어내는데서 발생하는 독특한 질감도 무시할 수 없고요.


캐빈 인 더 우즈의 한 장면. 공포는 결국 감정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 존재의 당위성과 설득력에 상처를 입으면 창작자는 전혀 의도한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공포영화가 당사자로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공포영화에 전혀 그 재미와 긴장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을 저 장면은 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자연스레,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날뛰는 사악한 존재들이라는 클리셰가 생겨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하지요.


지금 세 편의 영화를 예로 들어 보려 합니다.


첫번째는 바로 프레디 크루거가 등장한 13일의 금요일입니다. 엘름 거리에 악몽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살인마 프레디 크루거는 꿈속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도 자신의 정체를 흘리는 면모를 보입니다. 이는 잔혹하면서도 지능화된 현대의 연쇄살인마의 일면을 떠올리게 하며,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 대한 공포를 환상적인 소재를 섞어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풀어낸 결과입니다.


두번째는 바로 흑인 살인마가 등장하는 영화로 유명한 캔디맨입니다. 괴담을 쫓는 과정에서 그 괴담에 사로잡히고 이윽고 또 하나의 괴담의 주인공으로 재탄생된다는 이야기의 캔디맨은 13일의 금요일의 연쇄살인마와 그로 인한 악몽을 넘어, 그 기원과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결코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는 괴담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괴담이 왜 괴담으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괴담은 새로운 살을 덧대어 가는지, 그리고 왜 인간은 괴담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괴담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포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꼽는 영화는 바바둑입니다. 바바둑은 이제 외부에 대한 인간의 미지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을 넘어,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다루어 냅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든 싱글맘에게 언뜻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거세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되는, 이제는 조심스레 공존해야 하는 자신의 일면임을 인정하라 이야기합니다. 인정하기 힘든, 그러나 인정해야만하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두려움을 공포 그 자체로 구현해낸 것이죠.


이들은 각자의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미쳐 날뜁니다. 사유는 이렇습니다. 첫번째는 괴담으로서의 생명력을 존속시키기 위함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언행을 하는 이가 당했을 때 드라마적인 효과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관객을 보다 몰입시키기 위해 이것이 단순한 영화 내의 장치가 아닌 당신이 더욱 영화를 재밌게 즐기기 위한 몰입의 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죠. 마지막은 역시 이것이 보다 공포스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정한 것이 바로 자신을 덮쳐오는 것에 대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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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