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프로그램2017.08.19 19:40


 ...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붙였습니다만, 사실 1999년작 mbc드라마 왕초는 사실 고증과는 담 쌓은 작품에 해당합니다. 주요 인물들의 실제 행적이 사실과 다른 거야 그렇다치더라도, 등장인물의 나잇대가 아예 십수년 단위로 맞지 않는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죠. 실제로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직전 각색을 했다고 사전에 공지하기도 합니다.


기황후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실존인물과 창작물 사이에 대한 괴리는 지금 군함도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존중은 필요하다는 최소한의 입장에서부터, 오락을 위한 창작자의 주관이 일정수준 이상으로 개입되면 곤란한 소재가 존재한다는 입장, 그와 반대로 창작의 자유를 위해선 어느 정도의 사실관계는 왜곡해도 무방하다는 입장, 심지어는 아예 창작에 있어 성역은 없으며 어떠한 것을 다루어도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사실은 사실 그 자체로 다루어야 한다 보는 쪽까지 있습니다.


드라마 왕초는 어떠한 입장일까요. '창작의 자유를 위해선 구체적 사실관계를 어느 정도 왜곡해도 된다'는 세 번째 입장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따지고 보면, 네 번째 입장 '작품은 작품, 사실은 사실'이라는 쪽에 해당합니다. 이 드라마는 미화가 배제될 수 없는 구조인 김춘삼의 자서전, 그리고 사실상 구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영화 거지왕 김춘삼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초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거죠.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김춘삼은 공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니 그와 그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다룰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이야기적으로는 흥미롭지만 역사적인 비중으로 따지자면 그리 중요한 인물은 아니므로, 구체적인 검증과 기록의 대상이 되지 못한 거죠.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또 다른 유명한 작품과 상당 부분 맞닿습니다. 기실 왕초가 방영할 당시 왕초는 그 작품의 서민적, 언더독 버전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요. 예. 장군의 아들 말입니다.


당대에도 왕초의 진실이라는 식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고, 조폭미화물이 아니라더니 거지미화물이 아니더냐는 식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거두절미. 왕초의 주인공은 차인표가 연기한 김춘삼입니다만, 그 시대적 배경상 '김두한'이 등장합니다. 본 작에선 이훈이 연기하죠.


김두한. 비중만 따지자면 조연에 해당하고, 실질적으로 어느 시점이 되면 이야기의 진행에조차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까지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을 결코 가볍게 다룰 수가 없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유명한 주먹패 출신으로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었고, 동시에 대한민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장군의 아들의 주인공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실존적인 무게감이 이렇게나 크면서도 동시에 창작과 윤색의 덧칠을 이만큼이나 더해져왔었으니 다루기가 쉽지 않겠죠.


실제로 90년대초 장군의 아들 시리즈가 제작되었고, 그 아류작들-그러니까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주먹패들의 이야기-이 몇이나 나왔으면서도 결국 2002년 야인시대로 메가히트를 기록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이 '김두한'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측면을 비틀어서 나온 것이 바로 김춘삼의 이야기입니다. 김두한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많이 다루어졌고, 동시에 다루기 까다로우니, 상대적으로 비슷한 시기 비슷한 인물의 새로운 측면을 부각하여 다루어내는 것이죠. 김두한이라는 히트카드는 이야기의 흥미를 돋구는 선에서 그치게 하고 이전의 창작물에서는 다루지 않던 김두한의 비교적 어두운 측면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김춘삼에겐 일종의 역보정이 가해졌고, 결과적으로 김춘삼에 대해서 미화 논란이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왕초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오래 기억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재작년 어게인 왕초라는 이름으로 당시 출연했던 배우들이 다시 모여 재연하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죠. ...어게인은 정식 프로그램으로 승격되지는 못했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이 드라마, 사실 꽤 재밌습니다. 당대 '은실이'를 상대로 후발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로 이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인기도 괜찮게 끌었고요.


왕초의 강점은 소재입니다. 거지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메인 콘텐츠인 경우가 과연 앞으로 몇번이나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의 희소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또한 결국 역사적 인물이 되어 버린 김두한을 다룬 야인시대 등이 구체적 사실로 인해 나름의 한계선이 정해졌던 점에 비해, 왕초는 사실상 완전히 판타지의 영역에서 다루어졌지만, 동시에 그러한 콘텐츠들이 지향했던 재미도 나름대로 흥미롭게 풀어냈거든요.


연기도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일단 조역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발가락의 허준호는 비굴하면서도 교활하고 야심찬 캐릭터를 너무나 훌륭하게 소화했고, 홍경인이 연기한 날파리는 작품의 주제를 충실하게 전달하며 심지어 1인 단독으로 극을 끌고가는 저력을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앵무새 역의 김세준은 극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맨발의 윤태영의 개그 연기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입니다. 류덕환이 연기한 쥐똥은 될성부를 떡잎은 애초부터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고요.


차인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 드라마에서의 김춘삼은 차인표의 인생 캐릭터입니다. 묘하게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해 방황하면서도 묘하게 선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저 허우대 멀쩡한 사람에게 저렇게 어울릴 수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잠깐잠깐 뜨끔하는 연기를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조차 작중에 묘사된 어리버리한 김춘삼이라는 캐릭터에 튀지 않는다는 것이 참 인상적입니다.


아무리 현실의 인물이 그러하더라도, 그리고 일부의 요소를 차용해 오더라도 만들어진 캐릭터와 구현된 이야기는 그것과 별개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실 저는 그리 불편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김춘삼이 훨씬 저명성 있고 공공성 있는 인물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결국 근본은 그겁니다. 만드는 사람은 이건 현실에서 몇몇 요소를 차용한 별개의 창작물이라고 명백히 밝혀야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작품은 작품 현실은 현실이라 명백히 구분하고 작품을 보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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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