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방영된 mbc 드라마 왕초는 당대 특정 인물에 대한 미화와 특정인물에 대한 비하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바 있습니다. 작품이 방영되기에 앞서 픽션이다라는 메시지가 나왔지만, 어디 특정 인물을 전면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그러한 논란에서 자유롭기가 쉽나요.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왕초는 사실 꽤나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얼마 전(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2년 전이군요) 방영되었던 리멤버 왕초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비록 정규편성에는 실패했지만, 한대 열광했고, 추억이 되었고, 인상에 확실하게 남은 추억의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실제로 저도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고, 최근 mbc 유투브 채널에 올라온 전편을 천천히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왜 그렇게 재밌었을까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거지라는 신선한 소재에 더해 일제강점기, 해방기, 6.25전란, 전후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사내의 뜨거운 이야기라는 점을 들 겁니다. 결코 이어지지 않을 듯 하면서도 결국은 이어지는 운명적인 사랑도 빼놓을 수 없고요. 작중에는 언급되지만 역사의 한페이지를 수놓은 인물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하고,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단연 매력있는 악역을 들 수 있습니다.


차인표가 본 작에서 꽤 괜찮은 연기를 보입니다. 허준호와의 캐미가 상당히 괜찮죠.


본작에서 악역이라 부를 만한 인물은 대충 대여섯 정도 됩니다.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일본 순사에서 비리경찰까지 거치는 아베, 고문기술자인 센세이, 춘삼의 오랜 친구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친구의 이름으로 배신했던 형도, 그리고 춘삼의 라이벌격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발가락이 그러하죠.


이들 가운데 몇몇은 최후에 개심하고 반성하지만, 또 몇몇은 끝까지 악역의 포지션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발가락은 후자에 가깝지만, 단순하게 그렇게 잘라버리기엔 그가 본 작의 주인공인 김춘삼과 맺는 관계가 너무도 독특합니다.


그는 춘삼을 싫어한다 공공연히 밝히고, 실제로 몇번이고 마찰을 일으킵니다. 춘삼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염천교 식구들을 괴롭히기도 하죠. 어린 시절 왕초 자리를 두고 겨루는 과정에서 그에게 자신의 한쪽 눈을 잃어 그에 대해 원한을 품고, 춘삼은 물론 그의 가족들까지 가만히 두지 않겠다 이야기하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그는 변화한 시대상을 맞을 때마다 춘삼에게 몇 번이나 일종의 화해요청을 '먼저' 하곤 했습니다. 그 화해의 이면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심리와 함께 서로가 부딪히면 힘들 거라는 일종의 위협이 엿보입니다만, 동시에 한 때 같은 움막에서 먹고 살았던 사이지 않냐는 일종의 동료의식이 일정부분 베어 있습니다. 춘삼이 당대에도 올드하지 않냐는 평가를 받던 이해심 넘치는 선역의 포지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화해 요청을 먼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굉장히 독특한 일입니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행동의 변화의 주체성을 넘기고 화해를 요청하는 악당이라니. 물론 춘삼은 이러한 발가락의 요청을 너무나 간단히 거절해버리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주인공과 악당의 그것만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지독한 악역의 포지션처럼 보이는 발가락이지만 그는 춘삼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동시에 춘삼도 발가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춘삼은 거지패의 왕초로, 발가락은 이정재의 최측근으로서 살아가기에 이전과 같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일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동시에 최소한 서로가 처한 입장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춘삼이 가장 오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서로에 대한 일종의 동질감마저 표현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발가락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 홀로 세상에 맞서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내는 춘삼을 달리보고 있습니다. 춘삼은 발가락을 상종도 못할 인간처럼 이야기하지만 위급할 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죠. 결국은 그가 자신과 함께 대구의 움막촌에서 출발을 같이하는 인물이니까요.


발가락의 포지션은 여타의 작품에서라면 최후의 최후까지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반대로 너무나 간단하게 잡졸로 전락하곤 합니다. 성장한 시점에서 발가락이 처음 등장할 때 가장 무서운 악역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장 위협적인 악역도, 가장 짜증나는 악역도, 가장 미운 악역도, 그렇다고 웃긴 악역도 아닌 상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까지 나아가죠.


쉽게 말하자면  그는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입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루기도 까다롭고, 활용하기도 곤란할 정도로요. 위협을 줘야 하는 악역은 익숙해져선 곤란함에도 그는 이 애매한 포지션을 끝까지 유지하여 작품에 색다른 재미를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종래엔 결국 그도 시대의 한 사람이구나라고 여겨지며 춘삼과 겹쳐지는 일면을 보이죠.


이는 결국 김두한, 이정재라는 실존 역사 인물의 행적을 작중에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보인 행보에 너무 커다란 창작자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제한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김춘삼과 발가락은 본작에서 사실상 창작 캐릭터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실존 역사 인물을 제치고 여기저기서 맹활약하고 역사의 흐름을 건드려버리면 이야기의 흥미도 떨어지고 실존감도 낮아지는 문제를 낳을거라고 본 거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이실존인물의 주변에 위치한 창작캐릭터라는 독특한 포지션이 결국 독특한 캐릭터성으로 이어진 겁니다.


아마 제작자들에게 이러한 캐릭터를 다시 만들어보라면 다시 만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배우 허준호의 호연도 호연이지만, 차인표가 맡은 김춘삼과의 관계에서 불거지는 독특한 분위기, 뭐 하나 딱 짚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는 시대상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며 생겨난 균형미에서 불거진 캐릭터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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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