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건


호러 장르이건,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감춘 살인마 캐릭터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캐릭터들은 손쉽게 감출 수 있는 작은 흉기를 무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종종 당혹스러울 정도로 편의적이라 느끼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컨데 날 길이가 20cm 정도도 안 되는 잭 나이프를 든 살인마로부터 연인을 지키기 위해 야구배트를 휘두르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 저항감없이 떠오르죠? 그만큼 이 장면이 익숙하다는 겁니다. 오늘 다룰 클리셰는 이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방망이를 든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칼을 든 사람에게 맞서는데, 칼을 든 살인마에게 너무나 허망하게 제압되어 버립니다. 세세히 따지고 보면 단순히 제압되는 것을 넘어, 엄연히 평범을 가장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살인마에게 기세부터 힘까지 모든 면에서 밀립니다.


사실 잭나이프가 위협적인 흉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구방망이 같은 것도 무시무시한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매 한 가지거든요. 무엇보다 칼에 비해 길이도 길고, 다루기도 쉽다는 엄청난 장점이 존재하는데도요. 칼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훈련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칼에 다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결사의 정신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남자를 작은 칼을 든 연쇄살인마가 쉽게 제압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는 장면은 아닙니다.


이것은 살인마를 절대적인 위협으로 놓고, 이야기의 위기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현실에선 총을 맞고도 맨손으로 무장강도를 쫓아보내는 사례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케이스도 아니고, 호러나 스릴러에 그렇게까지 어울리는 장면도 아니거든요. 결과적으로 여러 작품에서 자그마한 칼을 든 것만으로 덩치도 크고, 무기 길이도 훨씬 긴 희생자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제압하는 천하무적의 살인마들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스크림이 당대 잘 만든 영화로 평가받았던 데엔 저런 작은 칼을 든 살인마가 건장한 육체를 가진 이들이 무력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충실하게 잘 만들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과거의 무한탄창처럼 그저 철저히 재미와 흥미를 위해 마련된 작위적인 설정인 걸까요? 따지고보자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 현직 경찰 및 경찰대학 출신의 김복준이, 흉기를 든 상대에게 공격받은 이후 칼날을 보면 몸이 굳는다며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밝혔던 바 있습니다. 육체를 단련하고, 여러 극한 상황을 경험한 경찰도 이러할진대 칼을 든 상대와 대치할 것이라 상상조차 않은 일반인들이 굳어버리는 것은, 그리고 이로 인해 더욱 손쉽게 제압당해 버리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상기에서 총을 든 상대를 맨손으로 쫓아보낸 케이스가 있는가하면, 일가족이 부엌칼 하나에 벌벌 떨며 강도를 당한 사건도 존재하거든요. 검도삼배단이니 하는 것이 단순히 무기의 길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칼에 대해 가지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이 있긴 하다는 거거든요.


또한 계급이 깡패니 하는 말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칼을 든, 그리고 자기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사람은,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이겨내는 것을 너무나 손쉽게 해냅니다. 자신이 살인마라고 생각하는 쪽과, 자신이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쪽이 맞부딪힌다면 당연히 전자가 손쉽게 이겨낼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이미 몇 번이나 극한 상황을 경험하며 막다른 길에 몰려 온 몸에 아드레날린을 뿜으며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이들조차 너무나 손쉽게 제압하는 살인마들의 모습이 매번 설득력 있다고 말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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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