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한


만화 캐릭터 이야기를 하며 와스프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100개의 캐릭터 가운데 와스프의 순위는 고작해야 94위. 섹스어필이라는 제한이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 싸움에 가까웠던 해당 설문에서 와스프의 순위는 끝에서 세는 게 더 빠른 것이었습니다.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죠.


물론 해당 조사 자체가 2011년 기준이었고, 해당 글을 올렸던 시점은 앤트맨 개봉은 커녕 울트론 개봉도 아직 이뤄지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코믹스가 원작이라 하더라도 성공한 영화 시리즈가 이후의 이미지를 선도하고 인지도를 폭발적으로 높이는 효과를 생각해본다면, 저 순위는 차후 조사할 경우 대폭 변경될 가능성이 높죠. 무엇보다 저 순위는 호프 반 다인이 아니라 재닛 반 다인에 해당하는 순위였으니까요. 물론 미셸 파이퍼가 연기한 1대 와스프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만.


다음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라는 전제가 있다면, 이 영화는 썩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작 특유의 끊는맛이 좋았다면 다소 고개가 갸우뚱해질지도.


여하튼 그런 이야기를 하고도 앤트맨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지도 몇년이 흘렀습니다. 앤트맨 본편은 물론 어벤져스2와 3에, 심지어 와스프가 주인공인 앤트맨과 와스프까지 개봉했죠. 이쯤이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꽤 이상한 일입니다. 쓴다고 해놓고 쓰지 않은 글이 아무리 부지기수라도 말이죠.


그에 따라 오늘은 앤트맨과 와스프를 본 후기를 간단히 남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겸사겸사 앤트맨의 액션에 대한 감상도 함께요.


사실 앤트맨을 처음 보았을 때 떠올린 것은 '디즈니식 화법에 따른 가족 영화'였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것은 80년대 말에 개봉했던 애들이 줄었어요였고요. 일상의 사소한 요소들을 일정한 변화를 통해 환상적인 모험으로 변화시켰던 애들이 줄었어요는 오랜 시간 디즈니 랜드에서 테마파크로 운영되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죠.


앤트맨도 그러했습니다. 이미 존재했던 여러 요소들을 적절히 차용하여 하나의 가족영화를 완성했습니다. 이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죠. 커지고 작아진다는 것은 어찌보자면 너무나도 단순한 일인데, 이걸 다채로운 액션-특히 시빌워-과 스토리로 엮어내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연대기를 만들어냈으니까요.


앤트맨과 와스프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거대화 능력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발전한 측면을 보이는 와스프가 등장하고, 보다 확장된 개념의 가족을 논하며 영화에 다양성과 흥미를 더해주었습니다.


본작에서 마블 시리즈와는 다른 히어로 무비에서의 배우들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일련의 히어로 시리즈가 십수년 더 지속되면 히어로 무비에 출연한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로 나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앤트맨과 와스프의 한국 제목은 앤트맨2로 기획되었었습니다. 특정한 히어로들에 비해 극장가를 찾는 이들의 숫자가 적다곤 해도, 기대 이상의 성공과 평가를 거두었던 영화의 속편 제목에 2를 붙이는 건 흥행 측면에서도 그리 나쁜 결정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이 결정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아 역풍을 맞이했습니다.


영화는 앤트맨의 단순한 속편이 아니라, 여성 히어로 와스프의 데뷔작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주체성 여부를 떠나, 보다 원작에 가깝기를 바라는 관객의 바람이 작용하여 영화는 결국 앤트맨과 와스프로 개봉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와스프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진행자형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캡틴 마블에 앞서 그녀가 마블의 첫 여성 히어로로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요. 물론 앞서 블랙 위도우가 존재했고, 더 나아가 단독으로 시리즈를 대표하고 이끄는 캡틴 마블과 달리 팀업으로서 정체성이 구현된 와스프를 나란히 놓기는 애매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원작에서 어벤져스의 창설자이자 리더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녀가 영화화됨으로써 원작의 어벤져스 창설멤버가 모두 영화화되었다는 상징성을 떼어놓을 수는 없죠.


그 외에도 영화는 공공에 대한 위협과 괴리된 여성 빌런이라던가, 문제의 기원을 자기에게서 찾는다거나 하는 사색적 구도를 도입한 색다른 시도를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체 영화 시리즈에서 튀지 않는다는 범주 내에서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말이죠.


캡틴 아메리카와 에이전트 카터처럼, 1대 히어로들의 활약기를 다룬 콘텐츠가 나와도 재밌을 겁니다. 세계관에 눌리지 않는 배우들의 호연이 인상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평작에 가까웠다는 인상입니다. 딱히 실망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기대한 이상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마블 특유의 '다음'을 적절히 활용한 영화였습니다.


사실 어벤져스1 이후 개봉했던 아이언맨3, 어벤져스2 이후 개봉했던 앤트맨-시빌워-스파이더맨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연작의 갈증을 풀어주었던 작품들과는 달랐죠. 다중차원이나 시간이동 등의 떡밥을 거창하게 풀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물론 인피니티 워의 속편인 어벤져스4, 그리고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실마리가 될 캡틴 마블의 개봉이 예정된 상황이라는 점도 염두에 둬야 겠죠.


이 점이 영화의 비판점입니다. 이전 퀵실버와 스칼렛위치가 등장할 때처럼 내용의 진행만 따지자면 본편보다 쿠키가 더 나아가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제작의 편의성은 높여주지만, 자칫하면 러닝타임이 몇백분이나 차이가 나는 쿠기영상이 본편의 질감과 인상을 바꿔버리는 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영화에 대한 예고건,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가벼운 쿠키건, 기존의 영화 내용에 대한 수정이건, 반전이건 간에 말이죠. 영화 본편만 평가해야 하는가, 쿠키는 별개로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영화입니다. 상이한 분위기의 영화를 연결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빌런 캐릭터에 대한 고민은 곧 히어로 캐릭터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습니다. 영화 시리즈 전통이 이른 바 거울에 선 주인공형 악당이 첫 상대로 제시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 앤트맨, 앤트맨과 와스프는 그 다음을 떠올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하튼 전작에 호평받은 요소는 살리고, 혹평받은 요소는 신경쓴 속편이었습니다. 영리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동시에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처럼 연작과 속편으로서의 가능성을 넓힌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취향의 분화를 통해 마블시리즈에 입문하는 팬들을 늘리려는 전략의 결과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