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2018.07.06 18:10


 참 우습습니다.


예전에 운만 떼고 쓰지 않은 글이 엄청 많습니다.


동시에- 써야지 하고 등록은 해놓고 공개를 해놓지 않은 글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무슨 글을 써야 할 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 비공개 글들만 주르륵 훑어도 몇달은 써야 할 글이 나올 정도로...


여하튼 오늘은 작년에 인상 깊게 보고, 쓰려다 미처 쓰지 못했던 영화 겟 아웃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1년 전 글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예전 개봉했던 한국 영화 더 게임이었습니다. 예, 기억하시나요? 신하균과 변희봉이 주연을 맡았던 그 영화말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부분부터가 사실상의 스포일러입니다.


더 게임이 노쇠와 젊음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겟 아웃은 여기에 더해 인종적인 요소까지 더해집니다. 다만 더 게임이 훌륭한 연기와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만들어낸 졸작으로 불리는 반면, 후자는 이질적 요소를 적절히 섞어 독특한 미장센을 통해 펼쳐진 수작으로 불린다는 차이는 있죠.


영화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동시에 대상이 자신보다 뛰어나다 '인정'한 듯한, 이전의 인종차별에 비해 발전한 것이 아니냐는 인상마저 줍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영화는 우리가 흔히 가지는 별 거 아닌 생각도 엄연히 차별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역설합니다.


기대가 정말 커서 다소 실망했던 영화였습니다. 워낙 극찬의 연속이어서 전 정말 세대를 앞서는 명작일 줄 알았거든요. 알고봤더니 현실 체험형 영화였습니다. 물론 나쁜 영화라거나 재밌게 보지 않았다는 소리 역시 결코 아닙니다.


한국은 흔히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분류되곤 하고, 실제로 인종의 비율로 따지자면 서서히 변화의 폭이 커진다고 해도 아직까지 '절대'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흔히 이야기하는 인종차별에 대해 몰이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이것이 과연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컨데 흑인, 백인, 황인이라는 표현은 한국 내에선 전혀 차별적인 뉘앙스가 담긴 것이 아닙니다만- 미국에선 색을 인종에 붙이는 걸 일종의 차별로 이야기하죠. 이건 자신의 피부가 노랗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인 입장에선 선뜻 이해하기 힘든 차별의 방식입니다. 희거나 검거나 노란 걸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은 다양한 인종이 공통된 목적을 위해 수없이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 일상이 아닌 이들에겐 굉장히 기묘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흥미롭게도 그런 우리 사이에도 흑인에 대한 일종의 인종차별적 발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소위 흑형으로 불리는 애칭, 성기 크기로 인한 섹스어필, 몸매에 대한 예찬이 그것이죠. 예? 뛰어난 부분을 뛰어나다고 이야기하는 게 어떻게 차별이 되냐고요? 이것이 바로 '흑인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이후 등장한 새로운 방식의 편견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종일관 관객들을 바라봅니다. 너희들은 자유로워? 라면서 말이죠. 이 감각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영화를 보다 덜 체감하는 방식으로 즐길 수밖에 없겠죠.


이전의 인종차별은 상대에 대한 열등함을 기반으로 이뤄졌습니다. 머리가 나빠서, 가난해서, 성격이 모나서 등등. 하지만 사회는 올바름을 지향하도록 구성원을 교육시켰고, 이러한 방식의 차별은 배제하고 훌륭한 것은 훌륭하다고 칭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비해 흑인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아졌지만, 그 좋아진 이미지는 특정한 영역에 국한 되었습니다. 상단의 육체적인 측면, 성적인 측면 등이 그것이죠. 엄연히 정신적인- 내지 자본적인 가치를 더 우위에 놓는 현대사회에서 육적인 면이 우선하는 인종이라 평하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이름의 차별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이미지대로 그 인종 자체를 판단해버리도록 만들고 그 외의 것은 무시하게 만드는, 좀 더 교묘한 방식의 인종차별이 가해진다 주장하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실제로 작중에선 찬양을 빌어 실질적으로 흑인을 모욕하는 인물들이 무수하게 등장하죠.


무지와 편견은 그러한 측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개인을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동시에 양자는 거대한 담론의 차이를 보입니다. 이해없는 긍정적인 방식의 이미지는 새로운 것을 쌓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지만, 차별을 넘은 편견은 자칫 또 다른 방식의 차별을 낳을 수 있는 기저가 되어 준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뽑은 영화의 백미는 야밤에 질주하는 집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이질감과 압박감, 공포는 정말이지 말로는 표현이 어렵더라고요.


영화 속 백인 등장인물들은 내내 흑인의 육체적인 뛰어남과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것을 얼마든지 다른 수단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재고품처럼 취급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노예제'를 떠올리게 하고, 최소한 육체만은 자신의 것으로 지킬 수 있었던 이전의 시대와 달리 지금의 차별은 자신의 몸마저도 뜻대로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현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직 흑인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두는 것이 과연 대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겉으로는 그들을 우대하는 듯 하지만, 함께 일상을 구성하면서도 달리 대우하는 것 그 자체가 또 다른 방식의 차별이 되어 버립니다. 흑인의 육체적 뛰어남만을 찬양하는 것이 과연 또 다른 방식의 차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특정한 이미지를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하며 무리하게 대입하는 것 역시 차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무지는 정견과도 닮아 있습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특정한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확대시키지 않습니다. 한국어 '네(니)가'라는 말을 들은 영어권 흑인이 그것을 자신의 경험(Nigar)에 등치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별이나 비하의 표현이 되지 않는것처럼요. 다만 그러한 무지로 스스로를 이야기하기엔 한국은 너무 세계화된 국가고, 대중문화에선 특정한 인종을 특정한 쓰임새로 사용되어온 것에 적잖게 학습되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차별을 당한다 생각하는 이들도 스스로 일종의 피해의식으로 인해 확대시키는 것도 있지만- 이 부분은 패스합시다.


사실 겟아웃에 대해 글을 쓰는 걸 잊다 올해 다시 떠올렸던 계기가 바로 차일디쉬 감비노의 This Is America였습니다. 양자를 엮어서 글을 써볼까 했었는데(영화 OST에 그가 참여하기도 했죠), 문제는 이게 너무 핫해져서 "에이, 다음에 쓰자"하면서 또 미뤄버린 거였지만.


영화는 뇌이식 수술을 통해 흑인과 백인이 통합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흑인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채 인식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오직 육체적인 면만 남습니다. 백인은 정신적인 가치를 지키고 여러 사회적인 수단을 발휘하여 흑인을 대체품으로 취급하며 교체를 반복합니다. 가장 본질적인 영역의 통합처럼 보여지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차별의 타파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대해 '인종차별을 다룬 스릴러물'이라는 정보 정도만을 알고 갔기에, 최면술이나 뇌 이식 등의 소재가 등장할 땐 뜨악했습니다. 이질적인 흑인들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고, 흑인들에게 가하는 차별적인 백인들의 모습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들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발상은 특별했지만, 그것들이 깊은 여운을 남기거나 하지는 못했던 이유기도 했습니다. 그 수단이나 기원이 너무 노골적으로 설명되어서 맥이 빠졌달까요.


또 특별하고 신선하다지만 이야기적으로는 사실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방식의 차별도 차별은 차별이다는 것을 영화로 표현해낸 것은 신선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이와 관련한 담론에선 또 하나의 정론인 상황이었으니까요. 당장 우리딴엔 친숙함이나 특유의 멋에 대한 표현으로 써 온 흑형이라는 말을 당사자인 흑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사용하지 않는게 좋다는 말이 대체 몇 년 전부터 나왔던 것인가요. 영화가 이전처럼 담론을 이끄는 주제가 되지는 못하는 상황이 된 거겠네요.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