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2018.07.11 07:49


 이번에


쓸 글도, 몇 년 전부터 쓴다고 쓴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정작 쓰지는 않았던 글로 분류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B급 문화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포스트가 있는데- 거기에 제시된 세가지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좀비오(리 애니메이터)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도 많고, 그 감상을 풀어놓을 기회도 적잖았는데, 묘하게 차일피일 미루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제가 이 작품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그겁니다. "폭주하는 기괴함 속 허탈한 웃음." 정말 웃긴 평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러한 생각이 절로 듭니다. 현재 세 편이 개봉되었고, 4편이 기획되었다는 이야기가 10년째 떠돌고 있는 이 작품은, 호러 장르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브라이언 유즈나와 스튜어트 고든이 협업하여 만든 작품으로, 호러 장르의 또 다른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배우 제프리 콤즈를 탄생시킨 영화로도 유명합니다.


이 영화는 제가 H.P. 러브크래프트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며, 좀비오라는 제목은 리애니메이터라는 제목이 일본을 거쳐 들어오며 설정된, 일종의 중역의 결과물입니다.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포지션에 가까운 웨스트도 무섭고, 적대자지만 희생자 포지션이기도 한 교수도 무서우며, 무엇보다 조력자에 가까운 인상의 학장이나 아내의 복수를 갚으려는 경찰조차 무섭다는 점입니다. 안심할 수 있는 캐릭터는 관찰자형 주인공인 댄과 그 연인 뿐인데 이들조차...


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으니, 정작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지 잘 모르겠네요.


일단 이 작품을 어떠한 계기로 접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부터 설명해봅시다.


중학생이었나요, 고생학생 때였나요. 열대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이래봤자 2시를 넘어서지 않는 시간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와 딱히 할 것도 없던 그 때, 주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뒤에 두고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한 영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좀비오였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좀비오2였습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제 감상은 뭐랄까요, 황당과 당황 그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어떤 장면인지도 기억합니다. 각 신체의 주인들을 줄줄 읊으며 광기에 찬 눈빛으로 시체를 되살려야 한다는 허버트 박사의 씬이었습니다. 특유의 폐쇄적인 분위기나, 명백히 매드 사이언티스트로서 피조물을 만든다는 관점을 제시하여 프랑켄슈타인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단숨에 깨닫게 하는 것을 통해, 여러 B급 영화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 영화가 B급이냐 아니냐는 제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충격스러운 비주얼 이상으로 인간의 광기를 다루어내는 모습이 제겐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온갖 기괴한 방식으로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모습을 보노라니 경악스럽기까지 했죠.


기술은 컴퓨터 그래픽이 상향평준화되다 못해 인식의 폭까지도 뚫고 넘어선 지금에 도저히 미치지 못합니다. 당장 30년이 넘은 영화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특유의 뻣뻣함과 답답함, 그리고 어설픔이 되려 작품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이건 굉장히 특이한 질감인데,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예전 B급 영화들이 사랑받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시 제게 있던 호러의 관점은 기실 13일의 금요일이나 사탄의 인형 등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크리쳐 묘사나 인체개조는... 완전히 인식의 범주 밖의 것이었죠. 좀비오는 만능약물로 모든 게 가능하게 만들었고, 제한이 없는 창작자의 상상력을 무차별적으로 구현화시키는 듯 했습니다. 해서는 안되는 것을 다루고, 또한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에서 상이한 감정이 들게 만들더군요.


바로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중반부부터 보았고, 본편이 아닌 속편이었음에도 영화는 제게 아주 강렬하게 각인되었습니다. 특히 온갖 신체를 짜맞춘 재생자의 신부의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선 그 무언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소위 말하는 B급문화와 호러 장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죠. 이후 제가 호러와 코미디 장르가 결합되는 것에 상당히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바로 이 작품 때문일 수 있습니다. 커다란 공포는 때론 황당할 정도의 웃음을 자아내곤 하니까요.


영화는 일종의 희극과도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때문인지 뮤지컬로도 제작되었던 바 있습니다.


접한 배경이 그래서였을까요. 좀비오는 특이하게도 속편과 본편이 따로 인식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물론 속편은 어거지로 이어붙였다는 인상이 강하고, 좀비오 그 자체로서 오리지널리티를 확립했던 본편과 달리, 지나칠 정도로 프랑켄슈타인을 염두에 둔 속편으로 자체의 매력을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듣곤 합니다. 이야기적 구조만 따지자면 그런 평을 듣는 것도 어쩔 수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가 전달하고자하는 포인트나 질감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제겐 쉽게 연작으로 인식되었고 평을 분리하는 것이 힘든 지경입니다.


이처럼 작품은 여러모로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을 정복하고자하는 광기에 찬 과학자와, 그런 과학자의 실험물로 전락한 인간 혹은 그러한 인간의 일부. 그리고 그러한 피조물의 역습으로 인해 파멸을 맞이하는 세상.


본 작품은 대중작품에서 다뤄진 초창기의 좀비물로도 평가되기도 하지만, 역시나 방점은 인체개조와 시체훼손입니다. 되살아난 시체가 보여주는 면면은 좀비와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기괴함을 뽐냅니다.


리애니메이터와 리애니메이터2의 모습은 프랑켄슈타인과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의 흐름을 고스란히 따릅니다만, 영화 자체의 음울하고 기괴하며, 구역질나기까지하는 작품의 캐릭터 묘사는 두 작품의 지향점이 전혀 다름을 보여줍니다.


속편은 이야기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원작의 마무리를 재현하기도 했을 뿐더러, 기괴함과 무서움, 특유의 웃음은 여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기괴함과 당혹스러움 만으로 정의되는 영화냐, 결코 아닙니다.


매력적인 약혼녀, 위협적인 적, 몰입감 있는 주인공, 이해할 수 없고 기괴한 천재 등의 다양한 캐릭터가 제각각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어찌보자면 지극히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에서 사람들의 인식을 벗어나며 영화의 흥미를 더합니다.


그리고 각자 캐릭터에 걸맞는 연기를 하여 극에 설득력을 더해주는데, 이 부분이 백미입니다. 친구의 딸에 욕망을 품은 노 교수에서부터, 연구 성과를 위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파멸에 밀어넣지만 정작 함께 하기 시작한 동료에겐 묘하게 집착하는 세기의 애송이 천재 과학자, 그리고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결국엔 광기에 몸을 맡겨 버리는 평범한 사람.


거기다 영화는 이러한 폭발을 정제시킬 기미도 없이 계속해서 확장시키다 마침내 우당탕쿵탕식으로 폭발시키고, 정리해버립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전혀 아쉬운 생각을 갖지 않게 합니다. 숙편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한편만으로 지향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다 보여주었다는 확신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점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입니다. 튀는 소재와 연출이라도 배우의 연기가 좋으면 얼마든지 몰입할 수 있으며, 때로 창작자는 똘끼를 발휘해 관객들이 허겁지겁 쫓아올 수 있게 만들줄 알아야 하며, 묘사의 극단에 가면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만들어 영화에 독특한 질감을 형성해 준다는 등 말입니다.


속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옴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마 창작자 당사자들도 당시의 질감을 지금 시점에 다시 되살리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배우나 감독, 각본가가 나이를 먹은 영향도 있겠고요. 제가 하고픈 말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겁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는 특히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제가 이야기하는 상이한 감정이 동시에 드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 겁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