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2018.09.27 00:42


 ...이라고 해봤자


근 30~40년 정도의 흐름을 짚을 뿐이지만, 시작해 보자.




 인간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보았을 주제.


809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전세계적인 환경보호운동이 대중문화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여러 작품들은 환경보호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고, 환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닥칠 암울한 미래를 작품상에 녹여내어 그러한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경계토록 하였다.


환경 오염의 주된 소재가 되는 대상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과거엔 가장 시각적으로 부각되고 또 체감되는 물과 동물이 대표적인 소재였다. 그러나 현 시점에는 보다 넓게 퍼지고, 막기도 힘들며, 그 피해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터지는 대기 오염으로 흐름이 번져가고 있다.


대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인간이 존재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인위적인 변화를 지양하고, 동시에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를 지적한다. 이는 화석연료의 사용이나, 화학약품의 이용, 원자력 발전 등으로 인한 전지구적 규모의 환경변화에 대한 깨달음에서 기인했다.


자연스레 우리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환경오염을 예방하도록 하는 실천적인 교훈을 담는 경우가 많으며, 실제로 학교 교육과도 적절히 맞아떨어지곤 해 저 연령층 대상의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바로 인간원죄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끼치는 자연에 대한 영향이 절대적이고 부정적이며, 이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편화했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특히 인간이 자연상에 존재하면서 생기는 부산물 모두를 일종의 오염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는 복잡하고 방대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규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한 오류에 가깝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공동운명체임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을 인간에 종속화시킨 우를 범한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하나다


상기의 인간원죄론에 대한 비판에 따라 나온 결론으로, 이 작품들은 '인간 역시 자연의 하나다'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것도 맞고, 자연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도 맞는데, 그것을 위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인간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해야 할 인간의 삶이, 인간이 규정한 자연이라는 이름에 구속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는 멀리 보았을 때 자연에도 그리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점은 현실적인 환경보호도 이루지 못한다는 우려를 불러 일으켰으며, 인간 역시 자연의 하나이므로 지나치게 양자를 분리시킬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이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기치 아래의 사회변화가 작품에 반영된 것이며, 동시에 현실상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환경보호단체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인간의 영향력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다는 결론(예컨데 원폭과 화산폭발의 비교같은 것)이 퍼지며,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주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당연하지만 '인간도 자연의 하나'라는 말은 인간이 자연의 대표자이니 맘대로 깽판쳐도 자연의 의지다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동시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가졌던 절대적인 우위와 같은 관점을 반성하며, 자연의 거대함 앞에 인간의 왜소함을 강조하는 장치로 양면적인 측면으로 다뤄지곤 한다. 이 변화는 인간이 자연과 대등한 관계 하에서의 공동운명체라는 관점이라기보단 차라리 인간의 자연에 대한 종속을 의미한다. 자연이 언제나 인간에게 호의적인 존재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동시에 인간이 자연을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박과도 같다.


물론 비판은 상존한다. 당연히 인간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더라도 분명히 환경에 작용하고 있음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로 인한 변화는 인간 외의 존재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해서 이러한 변화의 바람직함의 여부를 결정짓는 유일한 주체가 아니며, 이러한 변화가 다른 생명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변화를 예방할 능력을 가진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 관점은 외면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논리가 된다. 예컨데 지구온난화로 인한 변화의 부정처럼 말이다.




 인간이 변화의 모든 권리는 없다


쉽게 말하면 이거다.


사라지는 것에 가치가 있다면, 새로 생기는 것에도 가치는 있다. 그게 유전자 조작이건, 돌연변이건, 환경의 변화로 인한 신종이건 간에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에 대해 앞서 존재한 것에 대해 일일히 가치를 매길 수 없었던 그들에 대해서도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 즉 자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틀렸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좀 더 거시적이다. 결국 위 관점들은 자연의 변화가 인간에게, 덤으로 현재 지구상의 생명체들에게 유용할것인지 안전할것인지에 대한 관점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이 관점은 인간, 심지어 지구상의 생명체에도 국한되지 않고 자연을 보다 넓은 관점으로 파악한다. 보통 인간 이외의 또 다른 지성체나 새로이 생겨난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지만, 지구라는 행성을 생명체의 하나로 파악하거나 인간 이상의 초월자나 우주적인 무언가의 일부로 치환되기도 한다. (에어마스터의 작중 환경콘서트의 대사를 따오자면 "어차피 지각 5mm 두께의 일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해도 큰 일 아니다.")


인간이 모든 변화에 대한 권리가 없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로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 변화는 인간이 야기한 것 외의 것들도 다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인간의 손익을 계산하는 태도에 대한 경계에 더 가깝다. 심지어 인간이 야기한 변화조차 그로 인한 생각치 못한 영향이 발생했을 때, 인간은 그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이야기하는 것. (쥬라기 공원의 대사를 따오자면 "그들도 살아있는 생명체잖아요.")


차라리 운명론이나 종교적인 관점에 좀 더 가깝다.


조금 달리 말하면 니가 키웠다고 니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치? 정도의 느낌이다.


이 관점은 대개 '원죄'를 갖지 않은 대상을 내세운다.


새로이 생겨난 종의 기원(시저)이나, 그 자신이 직접적인 변화의 산물이거나(메이지 록우드), 애초에 의지를 갖지 않은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거나 하는 식으로.


X파일 중 멀더는 "하루에 수백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종이 생겨날까?"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이러한 변화의 권리와 책임의 핵심을 찌른 말이기도 하다. 애초에 인간이 이 모든 자연상의 일을 조절할 수 있을까. 동시에, 그로 인한 변화를 애초에 없었던 것인양 무를 자격이 있을까. 애초에 자연이 인간의 의도대로 따라주던 존재였던가.


당연하지만 이 또한 적잖은 비판을 받는 관점이기도 하다. 결국 작품을 보는 것은 인간이므로 그 또한 자연을 대표하는 자격을 갖고 있는데, 그러한 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저렇다 보니 상기의 비판점이 그대로 계승된다. 인간에게 유용한 자연의 일면이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고, 인간에게 부정적인 자연의 일면이 마냥 긍정적인 것도 아니니까. 무엇보다 기술의 발전과 그에 대한 향유로 인한 원죄가 과연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유된다는 것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필요하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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