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토 준지 시리즈 리뷰에서 '기괴하다'고 표현했었는데, 기괴하기로 따지자면 '탈피'도 뒤지지 않습니다. 지난 머리없는 조각상과 달리 이번 탈피는 호러물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들을 대거 차용하면서도, 이러한 조합을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창작물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특유의 활기와 독창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호러적인, 이야기적인 완성도만 따지자면 이토 준지 공포만화 악령의 머리카락 1권에 수록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높습니다. 이야기적인 밀도 역시 가장 충실하고요.


이 에피소드에 주목할 만한 점은, 아름다워지는 것에 대해 무던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요소들을 상대적으로 자주 엮이지 않는 소재들을 활용하여 이야기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연금술, 바바리맨, 무서운 아이 등의 소재를 엮어내며 이야기의 동력을 잃지 않고 진행해내며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끊임없이 자아냅니다. 실제로 본 작의 등장인물들 모두를 주인공으로 그만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탈피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모모코는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누군가가 뿌린 끈적끈적한 액체를 뒤집어 쓴 후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머리카락까지 자르게 됩니다.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누군가를 찾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유치원에서 다른 원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뜯어내는 것이 익숙한 치카라로 인해 골머리를 앓습니다. 치카라의 가족을 찾아 상담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모모코는 치카라의 집이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립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다며 자신을 따라오는 치카라의 피부가 매우 얇아진 상태임을 알게된 모모코는, 이후 자신에게 끈적끈적한 물질을 뿌린 사람을 잡아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얼마 전 만난 치카라의 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치카라의 집안의 비밀과 마주하게 됩니다.


 탈피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원제는 肉色の怪이고, 영미에서는 Flesh-Colored Horror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살색의 공포....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는데, 이와 비슷한 제목으로 Tales of Crypt의 한 에피소드가 국내에 소개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한 제목은 아닌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쉽게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제각각인 이야기들이 저마다 질주하며 끝에서 어우러지게 됩니다.






본편에 쓰인 클리셰들은 마찬가지로 크게 다섯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체실험 자체는 단순히 약물을 통해 변화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좀 더 극단적으로 가면 인체개조라는 소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경성학교는 전자에 가깝고, 직접적으로 인체를 부품의 하나로 전락시킨 인체개조까진 나아가지는 않은 작품에 해당합니다.


첫번째. 인체실험. 본 클리셰는 현실상의 성형수술, 의료 시술과 맥을 같이 합니다. 국제법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의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신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보존되어야 하는 절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후의 전쟁 등의 상황에서조차 국제법에 따라 각국에 시신을 인도토록 보장하고 있기도 하죠. 인간, 특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절대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예로 명시되어, 인체실험은 지극히 제한된 조건하에서 이뤄지도록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예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소리기도 하죠. 2차대전에서의 나치 독일과 일제는 살아있는 인간을 인체실험의 대상으로 사용하여 각국의 지탄을 받았었으며, 보다 나아지는 사회를 위해 이러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약속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실제로 이에 대해 합의하기도 하였죠. 과거 존재했던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인간은 인체실험에 대해 설사 칼을 대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도 극히 커다란 거부감을 갖도록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본작은 이러한 인체실험을 우리가 보편적으로 행하는 성형시술 등과 나란히 놓도록 만듭니다. 분명 보다 적을 효율좋게 제거하기 위해 인체실험을 행하는 전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보다 보편적인 가치- 예컨데 생명을 위한 인체실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체실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피해와 그로 인해 혜택을 입는 사람들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윤리적 논란이 일고 있으며, 특히 단순한 미용을 위해서도 이러한 인체실험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이의가 제기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을 건드리며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그 보편적 가치가 어떻든, 자신이 약자건 혹은 몸이 아프건, 혹은 지인이 고통을 겪고 있건 등의 이유로 어딘가에선 인체실험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 에피소드만의 독특한 점은, 이러한 인체실험 내지 인체개조는 프랑켄슈타인 이래로 보통 현대적인 의료과정을 통한 연구윤리와 나란히 놓는 것으 보통인데, 중세의 연금술을 주된 소재로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또한 프로 연구인으로서의 책임이나 윤리관이 아니라, 막연히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아마추어를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 역시 공포를 위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러 호러물은 초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임을 내세웁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게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두번째 편집증. 자신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편집증이 두번째 소재로 활용됩니다. 본작에서 편집증을 앓고 있는 것은 치카라와 그의 엄마입니다. 잡아뜨는 것이 첫번째고, 두번째는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 매달리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치카라는 그의 엄마의 행동에 대상이 되면서 전자를 습득하였습니다. 치카라의 엄마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계속해서 매달리며 양자를 갖게 되었고요. 이 과정은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되어 주고, 동시에 왜 이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지에 대한 지표로 작용합니다.


세번째. 무서운 아이. 언젠가의 클리셰 이야기에서 무서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니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토록 하겠습니다.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지만, 그 아이 역시 엄연히 악독한 일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죠. 하지만 본작은 단순히 무서운 아이를 내세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왜 그 아이가 무섭게 되었는지를 다룹니다. 즉, 본 작에서의 무서운 아이란 이야기에 흥미를 자아내는 소재이며 중심은 아니라는 겁니다. 즉, 무서운 아이라는 클리셰는 학대받은 아이라는 또 다른 클리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거죠.


네번째.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등치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의 악의는 인과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합리할 정도의 무작위적인 재앙과도 어느 정도 이어집니다. 본작에서 모든 악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치카라의 엄마는 일반인의 범주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정신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협력자라 할 수 있는 치카라의 이모, 그리고 어쨌든 모자관계인 치카라조차 그녀의 이러한 행보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러한 자신의 악의를 불특정의 대상에게 표출하려는 모습까지 보여주어 '깊은 산에서 마주치면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도 호랑이도 아닌 인간이다'라는 클리셰를 제대로 구현해냈습니다.


입찢어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바리에이션이 존재합니다. 그 여러 바리에이션 중에 하나는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악의를 표출하는 것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것은 미적관점이 뒤틀려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들까지도 포함합니다.


다섯번째. 미에 대한 집착. 이는 바바리맨 등의 소재-자신의 아름다움을 강제적으로 타인에게 보여주려하는 클리셰-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가진 미에 대한 집착은 때론 이해하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가깝게는 잠잘 시간까지 줄여가며 피부 관리를 하는 이들에서부터 좀 더 나아가선 온갖 보형물을 자신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삽입하는 이들, 심지어는 타인의 생명과 신체를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활용하는 이까지 존재합니다. 이만으로도 공포스러운데, 이러한 미적 감각이 비틀려 있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한다면 공포의 감각은 더욱 확대됩니다. 실제로 이러한 클리셰를 잘 보여준 도시전설이 바로 입 찢어진 여자일 겁니다.





본 에피소드는 사실 어찌보자면 산만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거리가 가깝지 않은 여러 소재들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치카라나 치카라의 이모 둘 중에 하나는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는 흥미롭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주얼적인 측면을 따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치카라, 치카라의 이모, 치카라의 엄마는 익숙하지 못한 인간의 신체를 보여주는 여러 과정을 순차로 보여주는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비주얼이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 가진 위상을 생각해보면, 저런 이야기적인 산만함은 허용할 범위 내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피부로 감싸진 모습이 보통이고, 그것에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들은 커다란 이질감을 느끼게 되죠. 특히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제작상의 편의점만을 따진다면 뼈나 내장이 차라리 익숙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요. 이토 준지의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선 참 비인간적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너무 인간적이어서 거부감이 일기도 합니다. 작품에 묘사되는 측면들이 어쩌면 '우리'에게도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하기에 더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본 에피소드는 일종의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악몽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죠. 본 에피소드에 대한 감상은 상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공포였습니다. 주연이 관찰자로 제시되었다는한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이토 준지 시리즈 가운데 가장 괴이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알숑규의 만화이야기방은 만화저작권보호협의회에 등록하여 운영중인 사이트입니다. ...오랜만의 이토 준지 시리즈 리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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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제목은


보통 본문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짓습니다만, 이번에는 그냥 무던하게 직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기괴한 호러"라고 말이죠.


여러 이유가 있을 겁니다만 확실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기괴한 호러라는 그 말 대로 상당히 정형적인 측면을 보인다는 겁니다. 연출? 나쁘지 않습니다. 이야기적인 구성?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토 준지하면 흔히 떠올리는 기괴함과 공포라는 감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흔한 이야기라고 격하할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는 여러 콘텐츠에서, 심지어 10대들이 즐겨보는 공포모험물에서도 다룬 바 있는 소재입니다.


그럼에도 이토 준지 특유의 미에 대한 집착과, 기괴한 그림들은 확실히 왜 이 작가가 호러 작가로서 이름을 떨쳤는지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머리없는 조각상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미술부원 루미는 동급생인 시마다와 미술 선생님인 오카베를 미술실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튿 날 루미는 오카베 선생님이 목이 잘린 채 살해되었으며, 오카베는 이상스러우리만치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오카베는 자신에게 비밀이 있다며 루미에게 털어놓겠다 미술실로 그녀를 끌어들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카베 선생님이 만든 목없는 조각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머리없는 조각상(首のない彫刻)





본 이야기에서 쓰이 클리셰는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혼이 깃든 인형입니다. 일본의 민속신앙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든 것에 신이 깃든다는 그들의 믿음은 자연스레 인간과 닮은 인형에게도 향했습니다. 어떤 신사에선 인형을 모시기도 하고, 또 어떤 신사에선 인간의 머리카락을 심은 인형의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자라나 공포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혼이 깃든 인형은 인간에 비해 수동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의지를 가져나 그 악의가 인간을 향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신체의 결손을 채우기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균형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이 본능은 때론 받아들여야만하는 현실조차 떨쳐 때론 비극조차 자아내기도 합니다. 사고로 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체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신체를 잘라 갖다 붙이려 한다는 식의 도시괴담은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육체 도둑입니다. 클리셰의 구성상 상단의 두 클리셰와 자주 엮이기도 합니다. 인생사의 허망함을 강조할 때도 자신의 몸만큼은 언제나 포함됩니다. 타고난 몸이 재산이라는 이야기도 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언제나 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때론 인간의 정신이 자신의 육체를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을 부속화하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인간의 신체는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기까지하여 이러한 육체의 강탈을 두려워하는 클리셰가 구축되었습니다.


슬리피 할로우의 한 장면


네 번째는 신체절단입니다. 당연하지만 인간의 신체는 원형을 유지하고, 또한 유지하기를 기대하도록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상에서는 이것이 늘 지켜질 수 없죠. 어느 정도 체제가 정립된 과거사회에선 이러한 신체절단을 극형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목이 잘리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고통을 줄이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양면성은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이어집니다. 범죄의 은닉의 수단을 위해 사람의 신체을 잘라내는 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시체의 손괴에 대해 따로 법규를 마련해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목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알아봄에 있어 가장 우선해서 인식하는 것은 얼굴입니다. 이러한 얼굴, 머리가 없는 존재는 아무리 다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인간에게 편안한 감정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어디에서 불거지는 지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과학적으로는 '뇌'를 빼놓고서는 논할 수가 없죠.


마지막은 역시 하루 아침에 바뀌어 버린 사람입니다. 늘 함께 하던 소꿉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데면데면 대하는 모습은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그것만큼의 공포도 없을 겁니다. 실제로 이 클리셰 또한 널리 이용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귀신 역을 배우 이광기씨가 소화했죠


예. 전설에 고향에도 나왔던 "내 다리 내 놔"와 결을 같이하는 작품이라는 겁니다.





최상단에서 '정형화', '흔한'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예. 그렇습니다.


공포학교, 그리고 학교괴담, 지옥선생 누베 등의 작품에서 '인형이 사람의 몸을 노린다'는 이야기대로 해당 에피소드를 전개했던 바 있습니다. 학교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형태인 사물은 크게 셋인데 보건실의 해부인형, 미술실의 아그리빠 등의 인형, 마지막은 운동장의 공부하는 소년상 등인데- 상기의 세 작품들 중 전자의 둘이 미술실의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과장 좀 보태서 등장인물만 달라진 동일한 에피소드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는 합니다. 장소만 달리하여 고스트 스위퍼에서도 백화점의 마네킹과 엇비슷한 이야기를 (신체절단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하기도 했죠.


학교괴담


그렇기 때문에 색다른 재미를 느낍니다. 각 작품마다 지향하는 분위기에 차이가 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연출하는 것은 동일한 소재라도 차이를 발생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역량이 개입되고, 표절작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구분됩니다. 그리고 저는 호러 작품으로서의 정통적인 재미는 이토 준지의 이 작품에서 즐길 수 있다 표현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70, 80년대 고어 호러 무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묘한 성적인 매력과, 괴기한 디자인,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결말까지.


그러니까


좀비오2


이런 느낌?


...그래서 제가 이 에피소드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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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미인박명


세기말. 갑작스럽게 아름다워지는 병이 여학생들 사이에 퍼지게 됩니다. 의학적으로 제대로 된 원인을 확인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아름다워진 여학생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는데 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세번째 주 금요일밤 같은 나이의 건강한 여자아이를 죽이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薄命





세기말 특유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세기동안 쌓아온 것이 붕괴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신세기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회오리치며, 특유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기 형성되죠. 실제로 슬리피할로우, 세기말 등 이러한 분위기를 매체화시킨 작품들도 적잖습니다. 이토 준지의 미인박명은 이러한 세기말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기말이 세기말이라고 불리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흔히 '잭 더 리퍼'일 것이고, 한국에서는 IMF가.... 슬리피 할로우는 연쇄살인사건이란 과학적 논지와 마녀라는 소재를 뒤섞어 기괴한 분위기로 세기말을 묘사했습니다.


김창완이 DJ이던 시절의 일화를 작품화한 스물살까지 살고 싶다는 영화가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가 자신이 어른이 될 때까지라도 살고 싶다는 절박한 표현이었죠. 하지만 이 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기말 즈음해서 별개의 의미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성장이 끝나는 시점부터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여기는 관점이죠. 인간의 삶- 특히 성인의 삶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며 열정의 소화이며, 신념의 변질입니다. 인간사의 풍파에 찌든 어른의 모습이라는 것이 때론 청소년들에겐 너무나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죠. 반면 인간사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나이는 사실 10대로도 충분히 달성가능합니다. 그러니 놀 건 스무살때까지 다 놀고, 그 이후는 모르겠다는 식의 발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죠.


이 작품에는 이러한 중의적인 의미가 모두 적용되어 있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미인으로 살고프다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앞으로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반문하고 있기도 하죠.





건강미라는 표현이 있고, 단순히 마른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화제가 되는 일도 잦죠. 그러나, 여전히, 마름을 아름다움으로 등치시키는 시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결국 확장하는 미디어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겠죠.


특히 일본은 한국보다도 '마름'에 대해 이러한 관념이 심해서 해외에서는 비교적 무던한 남성까지도 이러한 관점이 적용되기도 하고, 여성이 운동을 통해 복근을 만든다는 것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병적인 파리함- 결핵을 미인병이라고도 부르기도 했었죠.


사실 건강과 아름다움을 교환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다이어트에서 t를 줄였더니 Die가 되더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특정한 미적 만족을 위해 건강을 해쳐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성형수술이 보편화되면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전문의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받는 이들의 숫자 역시 늘어만 갔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첫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느 정도 건강미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성형수술을 통해 의해 만들어지는 부자연스럽거나, 지극히 보편적인 미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전만큼 열광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아름다움의 기준의 변화일 뿐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의 변화는 아닙니다.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된 서든어택2. 경쟁작인 오버워치와의 비교는 정말 지긋지긋 할 겁니다만. 물론 오버워치 역시 마르고 글래머러스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캐릭터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캐릭터들도 존재하죠. 오직 바비인형만으로 구성된 서든어택2와는 달랐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게임 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희소함에서 비롯됩니다. 어두운 피부가 당연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미인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밝은 피부이고, 실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것이 당연한 시대에 미인의 조건은 햇볓에 노출되지 않은 창백한 피부이며,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 저체중이 되는 것보다 과체중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려운 시절엔 통통한 것이 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과연 건강을 해치는 것과 나란히 놓아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못생긴 것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더 더욱. 한 떨기 스러질 꽃잎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그 뿐이라는 겁니다. 동시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플러스사이즈 모델을 마르게 이미지 변조하여 자사의 홍보에 써먹는 일, 태반캡슐 등등등...- 역시 긍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요.


결국 못생긴 채 끝까지 살아남은 아야코는 아름다움을 동경했을지언정, 그것을 억지로 닮아가려 하지 않았고 아름다움과 삶 둘 모두를 갖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을 거부하였기에 신세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겠죠.





개인적으로는, 본 에피소드가 이토 준지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이기는 합니다만, 기괴한 느낌은 반절로 줄이고, 세기말을 양념으로 쳤기에 타인에게 저만큼 인상적이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데 신세기를 살아가지 못하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갖기 못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부각되지 않아 단순히 분위기를 형성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사용된 클리셰는 세기말 세계의 변혁 앞에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 불거지는 사건, 그리고 타인을 해치면 자신의 삶이 연장된다는 미신 등입니다. 이야기적 분위기가 독특한 덕에 클리셰가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세기말이 가진 의미속에는 물질주의적이고, 퇴폐적인 무언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실제로 그 즈음해서 나온 콘텐츠들을 보면, 어떤 의미에선 2010년대 중반을 넘어간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미래지향적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죠. 농담 아니라 저 기세가 유지되었다면 매드맥스나 북두신권이 현 시점에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에피소드를 꽤나 좋아합니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들, 너무나 소소하지만 앞으로 살고싶다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들이 호러라는 본연의 정신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기말을 인상깊게 보낸 세대의 감상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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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벌집(蜂の巣)


벌집 모으기가 취미인 다카노. 잠시 벌집 모으기를 쉬고 있는 그에게 그의 여자친구는 어느 순간 부터 남자아이 귀신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카노는 그 소년의 행방을 알고 있었죠. 어쩐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이 모은 벌집에 넋이 팔린 다카노는 그의 벌집을 빼돌리려다 충동적으로 그 소년을 죽이고 말았었으니까요. 이름도 연고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소년이었기에 그렇게 묻히나 싶었던 그 때.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생각해보면 벌집이라는 건 참으로 기괴합니다. 디자인이건, 생태건, 뭐건. 너무 효율적이기 때문일까요.



 사용된 클리셰


벌집에 쓰인 호러 클리셰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호러 클리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던 X파일. Darkness Falls에피소드에서 이러한 자연의 역습+벌레의 공포를 잘 보여줍니다.


첫번째는 역시 자연의 역습- 그 가운데서도 세분화된 살인곤충입니다. 지구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이는 동물은 호랑이나 사자같은 맹수가 아닌 '모기'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실제로 인간이 벌레를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곤충에 대한 두려움이 본능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죠. 벌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직관적인 존재입니다. 추석 즈음만 되면 벌초를 하러 갔다 벌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벌은 독도 독이지만, 고통을 안겨주는 벌침이 주는 공포감 역시 대단합니다. 거기다 특유의 집요하고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한 마리만 나타나도 건물 한 층 전체가 뒤집힐 정도의 파급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벌집제거는 "119에 신고를 해서 제거를 요청해도 허용되는 대표적인 민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개미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이라는 완벽한 틀 아래 개체가 아닌 종으로서 존재하는 곤충이 주는 공포란, 개체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인간이 더욱 큰 느낌을 받게 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호러 장르에서, 이러한 살인곤충은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며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됩니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환경을 일종의 공격행위로 받아들이고, 결국 인간에게 반격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실제로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도심지로 들어온 말벌이 일으키는 피해 역시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제어하고, 자연은 하찮아 인간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오만한 생각에 대한 대표적인 반례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두번째는 이야기적 구조 클리셰, 인과응보입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큽니다. 결국 종교도, 도덕도, 법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관점 하에서 뻗어나온 셈이니까요. 호러 장르 역시 이러한 인과응보의 이야기적 구조를 자주 애용해왔습니다.


베르세르크, 아일랜드, 터미네이터, 강철의 연급술사 등등등 인과율에 주목한 작품들의 숫자는 셀 수가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인과율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심리라고밖에는 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본편에서는 두가지 인과응보를 설치합니다. 상기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침해→인간에 대한 자연의 반격이라는 것이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아이를 살해한 다카노가 결국 자신이 탐욕을 부렸던 대상과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상에게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입니다. 은혜갚은 까치류의 클리셰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니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조적으로 제시되는 소재가 크게 두 가지인데, 지극히 자연법칙에 부합되게 행동함에도 이성과 도덕을 가진 인간보다 낫게 행동하는 짐승, 그런 짐승과 놀랍도록 유사한 혹은 짐승과 구분이 투미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양자 모두 지극히 평범한 인간과 대비되는 방식으로 이야기 내에서 작용하며 과연 지금 사람들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조명합니다.


개가 없어지고 사람들도 불안해 했는데, 정작 잡은 개가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을,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죠.


실제로 이 클리셰는 비단 호러 장르만이 아니라 여러 장르에서 사랑받는 것입니다. 당장 어린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도 우화의 형식을 빌어 이를 풀어내기도 했고, 전설이나 설화에서도 널리 전해지는 것입니다. 상기의 은혜갚은 까치나 신데렐라의 호박마차를 끈 쥐들도 이와 같은 관점을 공유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이라 리뷰에 싣기엔 참 어색한 일입니다만 우리네 삶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 만화 커뮤니티에 남겼던 글이기도 합니다) 4차선 도로였습니다. 제 갈길 가고 있는 제 눈 앞에 왠 개 두마리가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것 참 신통하다 싶어 지켜보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빨간불임에도 무단행단을 하고 개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더군요. 그리고 그 개들은 녹색불이 들어오자 종종 길을 건넜습니다. 비단 이런 소소한 일만이 아니라 인면수심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온갖 일들이 오늘도 뉴스를 달구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알고 봤더니 사람의 신체더라" 라는 것입니다. 해변에서 수박깨기를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게 사람의 머리 였더라라는 괴담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적잖게 유명한 괴담입니다. 인간의 신체에 대한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존중이라는 것이 배제된다면, 인간의 신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할 수 있는지를 꼬집는 클리셰입니다. 실제로 사람이 사람을 '맨손으로' 때려죽일 수 있는 완력은 중학생만 되어도 갖게 된다는 것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꽤나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대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동질감을 때론 혐오감을 느낍니다. 그 범주와 정의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겁니다만 과거 인간이었던 것에 대해 느끼는 것만큼 복합적이진 못할 겁니다.


실제로 하천에 처박힌 기괴한 형상이 마네킹인줄 알고 건지러 갔더니 사람이더라 사실이 뉴스를 타기도 했고, 학교 하수도 공사를 위해 주변을 헤집다 이상한 뼈가 나와서 이리저리 살펴봤더니 알고보니 사람의 뼈더라라는 식의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죠.


물론 이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구축된 클리셰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사람이 사람의 삶을 사는 곳에서 기괴한 형체를 보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시체일 것이라고는 도저히 연결시키지 못할 때 힘을 가지는 클리셰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취향


제 친구 중에 버스 노선, 철도 경로 등을 꿰고 시간 날 때마다 그걸 타고 여기저기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저도 쏘다니는 걸 좋아해서 가끔 함께 하긴 했지만, 목적지를 두고 그곳을 향했던 저와 달리, 그 친구는 말 그대로 열차나 버스를 타는 것 자체에 목적을 가졌었습니다. 이 열차는 저 열차랑 뭐가 다르고, 저 열차는 뭐가 언제 수입되서 설치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것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타인의 취향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제가 수년간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체 저게 무슨 시간 낭비냐며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의 취향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존중해라'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터넷 유행어와 동명의 소설. 널리 표현되다 못해 관용어처럼 자리잡은 상황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타인의 취향은 어지간해선 이해하지 못한다는 소리기도 하죠.


하지만 '시체성애' 등의 도저히 사회 통념상 용납할 수 없는 취향을 배제하고서라도, 비교적 정상적으로 취급되는 취향조차 점점 고독화되고 숙성되다보면 '존중'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는 경우 역시 존재하죠. 후자의 예로 새치기를 하여 한정품을 손에 넣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전자의 사례로는 특정한 물품을 수집하다 가족들의 공간마저도 침해한 가장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더욱 극단적인 사례-예, 범죄 말입니다-를 들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마고치를 얻기 위해 성매매를 했던 여중생이나, 더 좋은 샘플을 얻기 위해 타인의 치아나 장기 혹은 가죽을 뜯어내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벌집 수집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취향입니다. 수집과정 자체가 위험하기도 할 뿐더러(물론 벌이 떠난 집을 얻는 것도 있겠습니다만), 그 무늬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관리하는 것도 마냥 쉽지 않은 일일테니까요.


이러한 마니악한 취미일 수록, 그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절판된 책을 구하기 위해 오프라인 서점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할 겁니다. 위처럼 목적과 수단이 변질되어 버리는 것도, 그것을 달성하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보는 제3자가 느끼는 감각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에 가까울 겁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결정짓는 '취향'이라는 요소, 거기에 더해 점점 정도를 벗어나는 수단과 목적까지 어우러지며 해당 대상 자체가 두려워지게 되는 것이죠.




 마무리


이 에피소드는 마니악한 벌집수집이라는 설정을 내세웠고, 더 나아가 귀신이나 괴물이 나오지 않기까지 함에도 어쩐지 초현실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 분위기를 결정짓는 가장 대표적인 요소가 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이겠죠. 그는 사람에게서 벌을 보호하기 위해 벌집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벌에 쏘이지도 않고, 벌로부터 호위받으며, 심지어 다카노에게 공격당한 이후 벌로부터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보호받기까지 합니다.


쉽게 보자면 그는 벌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연의 의사' 그 자체라 할 수 있으며 고의든 아니든 그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죽이는 다카노는 '인간'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다카노의 최후는 다시 환경의 고리를 완성을 상징하죠. 흙을 어떻게 이용해먹건 사람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간 역시 이러한 자연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님을 말벌의 생태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대로 바라보자면 아이는 목이 잘렸음에도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처럼 이 에피소드는 인간보다 말벌에 더 몰입하게 됩니다. 그들이 해온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일종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거죠.


진짜 오랜만의 리뷰네요. ...기분 탓인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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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승낙


승낙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연인 사이인 하야오와 미스즈. 이들은 결혼을 하기로 서로 약속했지만, 미스즈의 집안은 양자의 결혼을 결사반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스즈와 결혼을 위해 몇 번이나 그녀의 집안을 오가던 하야오는 결국 정나미가 떨어져 그녀와 헤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려던 하야오 앞에, 미스즈의 오빠 세츠오가 나타나 두 사람을 응원한다며 미스즈와 함께 결혼승낙을 받기 위해 다시 한 번 집을 찾아오라 설득하고, 그 날 밤 미스즈가 나타나게 되는데...


 승낙許し





승낙에 쓰인 호러 클리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죽음으로도 갈라지지 않는 사랑. 두번째는 구분되지 않는 삶과 죽음, 마지막은 진실을 감추는 배후자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클리셰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엮이는 클리셰이기도 합니다만, 마지막 클리셰는 주로 스릴러 장르에서 사용되는 것임에도 호러 장르에 삽입되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묘한 구도를 이루어 냈습니다.


사실 죽음으로 갈라지지 않는 사랑이라는 클리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쓰여온 소재입니다. 무덤가에서 발견된 아이의 입가에 묻어있는 밥풀에 대한 이야기나, 젖을 동냥하며 돌아다니는 여자귀신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아이에 대한 사랑도 그러합니다. 또한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나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죽음을 통해 이어진 연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있어 커다란 고비지만, 결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있어 영원한 단절도 망각도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기 때문이죠. 죽음으로도 가릴 수 없는 보편타당한,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가 존재하니까요.






비단 남성만의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만. 군대와 취업 이상으로 남성들이 스트레스를 가지고 두려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결혼할 여자의 집에 인사를 가는 것입니다. 가볍게 보자면 한 없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무겁게 보자면 이토록 무겁게 볼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결혼은 집안과 집안, 서로 다른 문화와 문화의 충돌과 결합입니다. 결혼의 당사자들은 가정을 형성함에 있어 이러한 주변관계의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간의 삶을 통해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여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이 이전처럼 커다란 흠결로 여겨지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특히 자신을 인정한 연인의 가정으로부터의 인정은 그 이상의 욕구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렇기에 '절대'라는 말을 붙여도 성립되는 이러한 관계에서, 자신의 의사가 배제되고 놀림감이 되는 것을 인간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도 하고프지 않은 연인과의 결별 뿐인데, 그들에게 이것은 해가 아닌 득입니다. 이 불합리한 관계도는 인간관계 모두가 가진 모순이지만. 특히 결혼승낙에서 강하게 불거지는 요소기도 하죠.





사실 이 에피소드는 상기에서처럼 상당히 고전적인 인상을 줍니다. 단지 서로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라는 감정 외에, 장인이 될 사람에 대한 원망,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슬픔에 대한 반동 등의 '연애감정' 외의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어 조금 더 설득력을 더했다 뿐입니다. 실제로 이 에피소드는 특유의 기괴함보다는 철저히 이야기와 분위기로만 몰아갑니다.


실제로 다양한 방식-이야기적 구조든 주제든-으로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방영되었었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바로 KBS에서 20년전 쯤 방영하였던 콩트네요. 유재석이 최면술사로, 서현선(...요즘 친구들은 누군지도 모를텐데... 전설적인 코미디언 서영춘의 딸이자 KBS공채 개그맨인데 서영춘은 또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여하튼 미녀 개그우먼으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이 최면술에 걸려 유재석과 사귀게 되는 여자로 나오는 에피소드였습니다. 극중 유재석이 최면으로 서현선을 최면으로 홀렸는데, 서현선이 불행한 사고를 겪은 후에도 원혼으로도 유재석을 찾아온다는 내용- 이었죠.


본편의 불행은 결국 타인, 그것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함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잣대를 극복해내지 못한 것은 물론, 이러한 잣대를 들이민 사람에게도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일까요?


 오랜만의 리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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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악령의 머리카락


악령의 머리카락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남자친구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치에미. 그녀는 남자친구가 바라서 기르기 시작했던 머리를 자를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에 쥐가 얽혀 죽는 일이 벌어지는 일에 이어,그녀의 머리가 알 수 없는 일로 인해 잘려 사라져 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의 전 남자친구에게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합니다.


국내 정발본에서의 제목은 악령의 머리카락입니다. 사실 내용을 생각해보면 원제인 다락방의 긴 머리카락이 더 적합하긴 합니다.






악령의 머리카락에 쓰인 호러 클리셰는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신체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클리셰 이야기에서도 다루기도 했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해당 글을 읽지 않는 이를 위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자신의 일부이기에 자신의 지배가 당연시되는 신체의 일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경우 외부에서의 위협보다 더 큰 위협으로 느껴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머리카락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기록할 만합니다. 신경요소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단백질 섬유니까요. 예컨데 머리카락은 미적인 요인을 제하면 적잖은 부분에서 이미 다른 외부적 요인으로 대체가 가능한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체온조절은 옷이나 모자, 냉난방 기구를 통해 보완이 가능하고, 충격흡수는 마찬가지로 안전모 등이 훨씬 뛰어난 효용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제 대머리는 하나의 섹시 코드로 자리잡기까지 한 상황입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정인에게 준다는 행위는 머리카락은 그만큼 소중하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잘라서 줄 수 있을 정도의 부위기도 하다는 소리죠.


그에 따라 지금에와선 머리를 깎는다는 사실 자체는 여타의 신체를 자르거나 혈서를 쓰는 것처럼 비장함이나 반성 등을 표현하는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자를 수도 있고, 아니면 기를 수도 있는 것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죠.


이 이야기는 이러한 머리카락의 축소된 성질에 대한 반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버린 여자, 여자가 버리려 한 머리카락. 이들은 각자가 생각한 약자를 향해 자신의 악의를 전달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결국 축소된 의미에서의 머리카락은 '수단'에 불과함에도 그것을 '인간'과 등치해놓기 때문입니다. 잔혹하게도 '수단으로 전락한 약자로서의 인간'은 실제로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이의 악의의 연쇄 역시 분명히 우리는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약자에 대한 악의의 표출의 방향성을 역으로 뒤집습니다.


과연 우리가 무심코 행하는 모든 것에 결코 악의가 깃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악의가 과연 약자만을 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그 악의가 역전되었을 때, 자신만은 떳떳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에피소드는 이야기적인 구성의 치밀함이나 깊게 삽입된 상징성으로 즐기는 에피소드는 아니게 받아들여 집니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부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면 벌어지게 되는 일을 그로테스크하게 전달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여기엔 '악령의 머리카락'이라는 번역명이 발목을 잡은 모양새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이야기적인 장치로 여동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독자가 몰입하는 대상으로 이야기의 완전한 제3자인 여동생을 설정하고, 그녀에게 굳이 일일히 언니의 이별 사실과 그녀의 괴로움, 그녀의 생사, 머리카락이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 등을 조명토록 하는 것은 외부적인 시선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의지를 악령으로 번역해버린 것은, 사실상 이야기의 근본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십상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어떤 무언가의 악의가 아니라, 어떤 이는 흔히 생각하고 여기는 것에서 비롯되는 무의식적인 악의가 겉잡을 수 없는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이니까요. 재수없이 악령이 무작위로 나쁜 일을 벌어지게 만든다는 것보단 훨씬 구체적이며, 그것을 인간의 의지로 일일히 조절할 수 없기에 더 큰 공포가 야기된다는 구조가 상처입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이 에피소드는 이야기적인 완결성보다는 이렇게 전재된 사실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암시하며 끝을 맞이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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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피를 마시는 어둠


본 에피소드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남자친구에게 차인 나미는 그를 극복하기 위해 살을 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거식증을 앓기 시작했고, 결국 구토하는 도중 피까지 토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루하루 쇠약해지던 그녀는 어느 날부터 하늘에서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꿈을 꾸게 됩니다. 비를 맞으며 괴로워하는 그녀의 앞에는 작은 구멍이 잔뜩 뚫린 손이 나타나 두렵게 만들었죠.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그녀의 입가와 침대엔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그러던 그녀 앞에, 자신을 좋아한다며 나타난 타니가 등장합니다. 그는 나미가 계속해서 굶으며 자신을 괴롭힌다면, 자신 역시 굶겠다며 선언합니다. 결국 나미는 마음을 고쳐먹지만, 거식증에 걸린 몸은 그녀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 앞에 타니는 그녀에게 보고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박쥐, 피, 하늘에 비치는 악의 존재 등등...





본편에 쓰인 호러 클리셰는 박쥐, 흡혈, 피 마시게 하기, 기괴하게 변신하는 육체, 절단되어도 제 멋대로 움직이는 육체, 구원자의 위치에 선 이질적인 존재, 어긋난 애정 등입니다. 호러 장르, 그 가운데서도 특히 흡혈귀가 등장하는 소재의 작품들을 즐긴 이들에겐 낯설지 않은 클리셰의 조합입니다.


실제로 본 편은 이토 준지 특유의 기괴할 정도의 상상력이, 인간이 응당 기대할 법한 전개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에피소드입니다. 특별히 무섭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역겹지도 않습니다. 기존에 이용되는 클리셰를 무난히 활용한 작품군에 해당합니다.


단지 상대방이 애정이라고 표현하는 요소가 자신에겐 겉잡을 수 없는 공포가 될 수 있다는 묘사가 언뜻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공포의 중심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러 콘텐츠에서는 피를 '인간이 가진 생명의 근원'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의지의 화폐라 표현하기도 하죠. 피를 이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기 때문이죠. 내의 피가 1/3 이상 빠져나가면 인간은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얼마 전 정부에서 헌혈에 대한 루머를 적극부인하며, 헌혈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었죠.


피는 각종 영양소, 산소 등을 체내에 골고루 퍼지게 해 주는 매개가 되어 주기 때문에, 극지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피를 생으로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열을 통해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완전식품으로서요.


이러한 실질적인 사안을 떠나서도, 피는 곧 생명과 직결하는 요소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혈맹, 혈기, 혈안, 혈세, 혈투 등등 피 그 자체가 '온 힘을 다하다' 내지 '가족 이상의 관계르 맺어지는 매개체'라는 관용어구로 자리잡은 상황일 정도로요. 실제로 아직 인체의 신비에 대한 탐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에도 피를 중시하였기에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고 목욕하거나, 의도적으로 몸에 상처를 내 나쁜 피를 빼는 등의 의료행위가 실제로 존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피를 마시며 자신의 불멸의 삶을 연장시키는 흡혈귀라는 존재는 인간의 근본에 새겨질법한 공포라는 감정을 자극하는 존재였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피를 강제적으로 빼앗는 존재니까요. 동시에 그는 피를 다루기에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팔이나 다리가 잘려도 그 안에 피가 있는 한 인간과 달리 그를 사용하는 면모를 보이는 매체들도 많습니다. 목을 자르면 죽지 않는다, 심장을 꿰뚫지 않으면 흡혈귀는 죽지않는다는 설화도 여기에서 차용된 셈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동경을 이끌어내는 존재로 해석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죠. 단순히 오랫동안 사랑받아 지루해진 소재를 일신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생명과 직결하는 피를 자유롭게 다루는 존재라는 사실 그 자체를 주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21세기 들어서의 뱀파이어는 수십년 전의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장 노스페라투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비교해보세요. 하다못해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과 프란시스 코폴라의 드라큘라를 또 비교해보세요.


자연스럽게, 그들을 가련하게 여기는 풍조마저도 생겨났습니다. 19세기 때까지야 혈액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필요할 때마다 사용하는 등의 일은 불가능했지만, 현대 의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피는 더 이상 인간과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요소가 아닌 매개에 불과한 상황이 되었고, 흡혈귀가 혈액팩을 빠는 것 등은 인간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과 크게 다른 일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 반면 십자가, 햇빛, 은, 흐르는 물은 건널 수 없다, 명령에는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등의 약점은 한 손에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니까요.


그리고 연민은, 더더욱 자연스럽게 애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애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면, 그건 더 이상 호러 장르가 아니죠. 그리고 호러 장르라 하더라도 이 애정이 가미된다면, 치를 떠는 공포와는 또 다른 맛이 되어 버립니다.





박쥐.


실제로 보신 적 있으신지요. 그러니까 동물원 같은 곳 외에 말입니다. 저는 있습니다. 두 번 있었는데, 국민... 아니 초등학생 시절 시골에 내려갔을 때 한 번, 그리고 군시절 또 한 번. 크기는 농담이 아니라 새끼손가락정도보다도 작았고, 날개를 펼치더라도 검지손가락에 미칠까 싶은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박쥐는 그 자체만 이야기하자면 일부 종을 제외하면 인간에게 '절대'라는 말을 붙여도 될 정도로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며, 특유의 생김새로 인해 묘하게 귀엽다는 인상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쥐는 특정 문화권에서 공포의 상징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결국 대체적으로 거멓게 생긴 녀석이 새까만 밤에도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익숙치 않은 존재니, 자연스럽게 공포의 감정이 덧붙여진 것이죠. 당장 상술한 뱀파이어나, 배트맨 등이 이러한 박쥐의 이미지를 차용한 사례일 겁니다.


거기다 상기 '일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흡혈박쥐'죠. 날카로운 이빨로 두꺼운 가축의 살을 찢어 피를 마시는 흡혈박쥐는 실제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만 하며, 왜 그를 흡혈귀의 부하쯤으로 보는지 납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흡혈박쥐도 크기가 작은 건 마찬가지고, 인간에게 덤벼들긴 하지만 맨손의 인간도 후쳐버릴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데다, 실질적으로 그 작은 녀석들이 피 몇 번 빤다고 해도 생명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공포심이나 혐오감이 확대된 감도 없잖아 있습니다.


실제론 조그마한 흡혈박쥐를 보면서 그 박쥐가 크다면- 그 박쥐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면- 이라는 상상이 가미되며, 공포 장르의 중요한 소재로 자리잡게 된 거겠죠.





실제로 본 작에서 흡혈은 전혀 무서운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한 희생에 가까운 행위처럼 보이기까지 하죠. 실제로 박쥐는 동료의식이 상당히 강한 동물이며, 흡혈박쥐의 경우 사냥에 실패한 동료가 있을 때 자신이 마셨던 피를 토해 먹여주는 행위를 합니다.


그렇다면 본작에서 느껴지는 거부감과 공포의 근원은, 누군가의 피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삽입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피가 섞이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흔히 창작물에서 떠올리는 감염에 대한 공포 등과는 다른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결국 본 작의 공포요소는 다른 게 아닌 거식증입니다. 종종 뉴스에서, 심할 땐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거식증이라는 것이, 과연 피를 마시고 그 피를 약한 동료에게 주는 박쥐들의 행위에 비해 무엇이 나은가, 그리고 정말로 더 무서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집니다. 이야기가 공포스럽지 않은 것도 결국, 애정 혹은 동료애라는 관계에서, 최소한 상대를 위한다는 의도라도 있는 박쥐들의 행위와 달리, 그 무엇도 낳을 수 없는 행위가 주는 거부감이 위치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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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사형수의 벨소리


사형수의 벨소리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사형수의 벨소리(死刑囚の呼鈴/Dead Man Calling)


집요하게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에 경기를 일으키는 가족.


이 전화는 과거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노리코의 가족을 습격한 폭주족들 가운데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오빠는 크게 다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게 되었고, 오빠 역시 거동이 불편해지게 되었죠.


이러한 상황임에도 저런 상황의 주범인 폭주족 후루하시는 법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을 비웃으며 반성하지 않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항소하여 판결에 불복하였고, 형량을 낮추기 위해 집요하게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연락하며 사과를 받아내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기가찬 노리코와 그 오빠는 형무소에 전화해 전화를 막아달라 요구하지만, 전화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그러던 중 형무소에 있을 폭주족 후루하시가 직접 집까지 찾아와 사과를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연실색한 노리코와 그 오빠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후루하시는 형무소에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오빠는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 무너지는 후루하시가 그가 형무소에서 만들어내는 환상일 것이라 추측하고, 그가 사과를 요구할 때마다 그 환상을 공격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결국 후루하시의 사과강요에 정신적으로 몰리던 오빠는 자살하게 되고, 후루하시는 이제 노리코의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노리코 역시 어찌할 줄 모르다 후루하시의 사형이 시행되고, 그녀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본 에피소드에서 이용된 호러 클리셰는 바로 생령입니다.


생령이란 죽지 않은 존재가 만들어낸 사념이 구현화된 것으로 흔히 묘사됩니다만, 말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빠져나온 영혼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유령은 아니지만 유령과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실체도 없어 물리칠 수도 없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집착으로 만들어진 존재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데 자주 활용되는 소재입니다. 생령이다보니 본체인 사람이 죽으면 모습을 감추기도 하지만, 때론 악령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령은 겉으로 보기엔 살아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도플갱어 등의 소재로도 이용되기도 합니다.






잔인하게도.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 그러니까 한국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법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정권에 따라 사법부의 판결이 뒤바뀌는 일은, 솔직히 말해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죠. 같은 기준을 두고도 다른 판결이 내려지고, 더 많이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 자에 비해 낮은 형량을 받는다는 것이 이미 사실로 입증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도덕조차, 법은 제대로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감정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고, 같은 기준을 두고도 전혀 다른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법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반 도덕과 동떨어진 판결이 나와 사법부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고,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가진 자들은 낮은 처벌을, 못 가진 자들은 높은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른 바 국민들의 '법감정'과 상이한 결저이었고, 과연 법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맞느냐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법이라는 시스템과 법감정이 분리되는 사례는 여럿입니다. 특정 범죄 수사시 수사관에게 성실하게 협조하는 쪽보다, 묵비권을 행사하며 수사를 방해하는 것이 낮은 형량을 받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또 친고죄와 같은 경우엔 피해자의 고통이나 보호와 상관없이 가해자들이 억지로라도 사과와 각서를 받아낸다면 법원에서 낮은 판결을 받아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우리는 '변호사 도착하기 전에 입을 열지 않는' 수많은 사례를 보고 있고, '강간 피해자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사과를 강요하는 또 다른 가해행위를 저지른 강간범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역시 뉴스에서 접한 바 있습니다.






사형수의 벨소리는, 사과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가해행위를 방조하고 있는 사회, 그리고 설사 가해의 대상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피해자에겐 계속해서 남는 마음의 상처에 대한 공포를 부각시킵니다.


옛 말에 때린 놈은 잠을 설쳐도 맞은 놈은 맘 편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오늘 날의 현실에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단 때린 놈이 죄책감을 가지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인감됨이 이전보다 못해졌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회의 계급이 이전보다 보다 교모해진 방식으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법치와 평등이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의 때릴 수 있는 놈이란, 단순히 큰 힘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재산상이든 권력이든 사회적인 지위가 보다 높음을 의미하며, 그가 위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보다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내심은 대등한 인간을 전제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죄책감과도 같은 감정은 존재치 않게 됩니다.


더욱이 피해자는 이러한 가해자에게 뿌리깊은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용서와 이해로 대변되는 피해자의 감정은 이젠 더 이상 사람들의 공감을 쉽게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잔혹화되는 범죄와, 법과 정의를 교묘하게 비틀어나가는 비열한 폭력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으며, 가해자는 모든 걸 잊어도 피해자는 모든 걸 짊어지게 되는 구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가해자와 만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해와 용서라는 방식으로 피해자가 사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죠. 진심이 없는 사과와 고통만이 있는 용서가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즉, 인간은 유흥(가학적 성향을 만족시키는) 혹은 감경(진심과 상관없이 사과만으로 형이 줄어드는)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겁니다. 이는 사과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가해행위를 방조하는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의 도덕감정과 괴리되어 있지만, 엄연히 사회에 존재하는 현실이며, 사형수의 벨소리는 이러한 현실의 공포를 독자에게 전달해줍니다.


용서가 가장 큰 복수라지만, 사과를 하고 받는 것, 그리고 반성조차 수단이 되는 사회에서는 쉽게 성립하지 못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겁니다.


알숑규의 만화이야기방은 만화저작권협의회에 인증하여 리뷰를 쓰고 있는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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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학대


학대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구리코는 자신의 약혼자 유타로에게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타로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자신을 따르던 나오 때문에 항상 방해받아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해 나오를 계속해서 돌봐야 했던 구리코는 더 이상 나오에게서 자신과 놀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이 괴롭힘의 정도는 점점 심해졌고, 결국 학대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오는 결국 큰 상처를 입게 되었고, 둘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자신이 괴롭혔던 나오가 자신을 원망하긴커녕 그로부터 계속해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구리코는 유타로와 헤어지고 나오와 함께 하기로 결심합니다.


둘 사이는 행복하게 계속되는 듯 했지만, 나오는 구리코가 아이를 낳자 종적을 감추었고, 구리코는 그런 나오를 기다리며 히로시를 양육합니다. 그리고 히로시과 나오와 처음 만났던 그 시절과 비슷한 나잇대가 되자, 구리코는 히로시를 무심코 나오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나오를 괴롭혔던 것은 단순히 유타로를 만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어느 정도 즐거웠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히로시를 과거의 나오처럼 괴롭히기 시작하며, 나오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이를 낳게 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한 밤 중. 어린 시절과 똑같은 옷을 차려입은 구리코는 히로시를 데리고 나오를 괴롭히던 공원으로 향합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쾌감과 불쾌함으로 인해 기묘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학대. 이토 준지.


본 에피소드에 포함된 공포 요소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동학대, 또 하나는 사악한 아이, 다른 하나는 상처의 대물림, 마지막은 바로 변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가장 먼저 심각한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누어 보죠. 한국의 경우 비교적 근자에 아동의 권리에 대해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회적인 뒷받침이 이루어 지지 못해 여러 사건 사고들이 때만 되면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일상적으로 아동학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을 제대로 문제삼고 있지 못하다는 이야기기도 하죠.


당장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기합을 받는 것을 넘어 주먹질 당하는 일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음에도 현실적인 문제로 적극적인 대책이 세워지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세요. 그 유치원 문닫으면 아이들은 다른 유치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 유치원엔 과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줄 수 있나요? 이러한 사회적인 시스템과 후진적인 인식이 맞물린 것도 있습니다. 미국에선 아이를 집에 혼자 두는 것이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맞벌이가 일상화된 한국임에도 이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지도 않을 뿐더러 애초에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음식을 가리는 아이에게 억지로 특정 음식만을 먹이려 하는 것,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도 학대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며 놀라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지금도 드물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선진 문화권에서 보장되는 아동의 권리를 보다, 우리네 아동의 권리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우리가 경험했고, 또한 시행하고 있는 것들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대 에피소드가 우리네 공포를 자극하는 것은, 이러한 아동학대라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우리'조차 무심코 아동학대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동학대가 여러 범죄에 비해 특히 문제되고 있는 이유는, 아이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내세울 수 없고,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레 아동학대는 여타의 범죄와 달리 독특한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보호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의 비율이 90%를 넘어간다는 점이죠. 즉, 우리 스스로는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강제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학대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부모, 혹은 친지, 혹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지고 있는 것 뿐임을요.







두번째로 쓰인 요소는 바로 사악한 아이입니다.


사실- 아이라는 것은 어른의 입장에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기분에 쉽게 휩싸이고, 그 고저차는 어느 정도 닳아버린 입장에선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립니다. 비단 아이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들을, 우리는 근본적으로 두려워하죠.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동심'이라는 이름의 '선함'을 붙여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죠.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봅시다. 그런 동심을 가진 아이들과의 삶이 이상적이고 평화로웠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죠. 성선설이나 성악설같은 논지를 떠나, 발생하는 분명한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경향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도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육체적인 능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더 심각한 범죄로 발전하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라는 겁니다. 심지어 그 가운데엔 이러한 악조건을 떨치고 자신보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학대하고 살인한 경우까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아이들을 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법은 응보의 성격보다는 교화의 성격이 강하고, 아이들은 성인 범죄자보다 훨씬 많은 계도와 개선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법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살이 되지 않은 여자아이가 아기를 납치하여 살인한 사건이 있었지만, 수십년이 흘러 법은 그녀에게 잊혀질 권리를 적용하여 이름을 바꾸는 것과 신변을 보호해주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하다 이야기되면서, 겉으로 보기에 귀엽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의 악의가 자신을 향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러한 악의를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상처의 대물림은 위의 요소들과 이어집니다. 상술한 아기를 납치하여 살인한 소녀는, 집안에서 처절한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으며, 도덕관념에 의한 행동의 제약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소 차별적인 말이 되어 버렸지만, 그 사람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집안을 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명제이며, 범죄자의 자식이 범죄자로 성장하는 경우 역시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이가 범죄자로 성장하는 경우보다 많은 것 역시 입증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이전엔 이러한 현상을 범죄 인자가 있고 그것이 유전자를 통해 유전된다며 이야기되었지만, 2차대전을 거치며 유전적인 요소는 완전히 배제되어 환경적인 요소만이 고려되었고, 결국 지금에 이르러선 유전적인 요소에 환경적인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정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요소는 현대사회가 복잡화되며, 단순히 정의내리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재산, 사회계급, 교육정도,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고, 이것이 의도치 않게 대물림되는 경우가 존재하기에, 이에 대해 공포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이미 끝났다 여겼던 사건들이 언젠가 다시 불거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상 체득하였고, 그 대상이 자신이 될 지도 모른다는 점을 다루고 있죠.


흥미롭게도 본작은 이러한 상처의 대물림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소재로 하여 다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유의 비틀림이야 말로 이토 준지가 만든 이야기의 강점일 겁니다.






마지막은 바로 변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어느 날 커다란 사건을 겪어 인간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경우, 없다는 말 못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사건을 겪어도 한 순간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부정할 사람도 많진 않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종종 이러한 인간의 믿음을 저버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잡히지 않을 연쇄살인마가 사람을 더 죽이다 붙잡히는 경우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과 똑같이 자아를 가진 인간을 죽이는 쾌락살인마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세상인 겁니다. 그렇게 거창하진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충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을 몇번이고 겪는 사람이 결국 도박에 뛰쳐드는 경우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때론 그것을 반성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은 앞으로 그 행동을 결코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아니며, 보증도 되지 못합니다. 앞서 저지른 잘못을 다시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 역시 무서움의 대상이 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얽은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단순한 구조는 아닙니다. 되려 가해자가 성장하여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구성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학대는 계속해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나오가 구리코를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복수하였다는 가정하에서 본다면, 자신보다 어린 아이(구리코가 나오에게)→여성(나오가 구리코에게)→다시 어린아이(구리코가 히로시에게)로 되풀이 되는 이러한 구조는, 죄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통념과 상충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현실이 가진 모순을 강조하며 공포를 부각시킵니다. 특히 이러한 학대가 어떤 합리적인 이유나 필요가 아닌, 정제되지 않은 유아 특유의 즐거움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 더욱 공포를 자극합니다.


본 에피소드에서 나오가 구리코를 사랑했는지, 그리고 나오가 의도적으로 구리코에게 자신의 자식을 낳게 하는 복수를 하고 떠나 버린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현실세계에서의 학대는 지금 어디선가에서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며, 그 학대는 과거 학대를 저질렀던 이가 또 다른 약자를 향해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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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공포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설명하다


언제부터인가 호러라는 장르는 서브컬처 가운데서도 특히 질낮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름철 특수를 노리고 비교적 낮은 예산으로 제작할 수 있는 영화 등이 몇차례 붐을 일으키면서 전체적인 수준 자체가 낮아졌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죠. 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보다 고급적이라 이야기하는 해석과 유추의 대상이 아닌, 즉흥적인 자극에 몰두한 콘텐츠라는 시선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저러한 시선에 절반은 동의하지만, 절반은 그렇지 못합니다.


공포- 라는 것은 즐거움과 함께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들은, 언뜻 단순한 자극에만 미쳐있는 듯 하지만, 그 속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위험'이라는 본질이 위치해 있습니다. 공포란 단순히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이러한 위험에 대한 인간의 본능과 학습을 통해 구축된 합리적인 경고 신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방울뱀이나 천둥 소리의 주파수에 사람들은 안정감을 잃어버리고, 독개구리의 선명한 주황빛, 끝도 없는 심연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이 그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이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을 통해 공포에 대한 시선을 달리하여 때론 극복하고, 때론 더욱 경계하게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위해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하려했고, 또 무엇 때문에 우리의 곁에 두려하는지.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구현시킨 것이, 바로 이러한 호러 장르의 콘텐츠인 겁니다.


일본의 호러 장르는 20세기 말 국내에 엽기라는 이름으로 둘어왔었습니다. 지금도 그 영향이 잔존하고 있기도 하고, 요 사이에도 볼만한 일본 공포 영화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특유의 질감에 이질감이 들기도 할 뿐더러. 국내의 수작들도 그 수를 불려가는지라 이전만은 못하네요.


이토 준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워낙 국내에 많은 마니아가 있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상징처럼 지금도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앞으로 이토 준지 콜렉션의 단편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우연히 몇권 선물 받아서 쓰는 리뷰...이기는 합니다만. 여하튼.


이토 준지 세계관 속 공포는 과연 우리의 어떤 두려움을 설명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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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