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장르에서


자주 이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 호러 영화 속 등장하는 연쇄 살인마는 일정한 분류에 따라 구분이 가능합니다. 살인행위에서 유희를 찾는 쾌락형 살인마, 스릴러적 구성을 위해 다양한 시설로 일종의 두뇌게임으로 몰고가는 퍼즐형 살인마, 일정한 도덕적 법적 책임을 물으며 인과응보적 구성에 일조하는 심판자형 살인마 등등등...


오늘 이야기할 '단독으로 살인시설을 설치하는 살인마'는 퍼즐형 살인마에게 특히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클리셰입니다.


반전을 위해 곳곳에서 사용되면서도 시설이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으려 했던 영화 하우스 오브 데스. 


살인행위, 특히 연쇄살인 행위는 철저한 비밀 하에 이뤄집니다. 사회의 기저에서부터 촘촘하게 연결된 구성망은 하나의 인격체가 또 다른 인격체를 반복해서 살인하는 일을 거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스템이 사각 하나 없이 완전히 뻗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여러 불운과 사회적인 무관심 그리고 몰이해로 인해 연쇄살인행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연쇄살인마들의 범죄행각은 등불 밑이 어둡다는 식으로 일어나거나, 아직까지 과학수사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의 일이거나, 사회적인 모순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회와 수사의 발전으로 인해 얼마든지 과거엔 연쇄살인마로 변화될 수 있는 살인자가 지금에 와선 여러 사유로 인해 한 번의 범죄 행위로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쇄살인행위는 지금에 와선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눈도주지 않는 취약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고요.


쏘우 영화 중, 그래 저거 한 두 사람이 저거 다 만들었다고 치자라고 넘겼던 사람들조차, 24시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공개된 지역에 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일 땐 황당해하더군요. 최소한의 현실성을 위한 당위성은 필요한 건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 시설을 이용해 연쇄살인행위를 저지르는 살인마라는 것은 점점 허황된 것이 되어 갔습니다.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며 사건과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을 범인들조차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거대한 시설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고, 또 뒤처리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허황된 일로 여겨지게 되었죠.


더군다나 사람들이 인식하고 감탄하는 시설물의 기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져 점점 말이 되지 않는 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전문화와 분업화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시설물을 짓는 것도 여러 사람들의 협업을 요합니다. 설득력 있는 시설이라면 저걸 짓는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흘러 나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되었고, 허술한 시설이라면 저런 걸로 사람들이 죽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는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창작물은 편의적으로 이러한 시설물을 짓는 과정을 생략하거나,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쏘우처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굴기 시작하면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리는, 철저히 비현실적인 작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H. H. 홈즈는 워낙 구별되는 특성을 많이 지닌 연쇄 살인마여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화로도 기획되고 제작 중이라 알고 있죠.


그렇다면, 이러한 클리셰가 자리잡게 된 이유는 뭘까요. 물론 푸른 수염류의 이야기나, 압도적인 계급을 이용하여 온갖 학대시설을 지어놓고 이용하는 정신나간 귀족에 대한 이야기가 적잖게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역사 속에서도 이와 관련한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100년도 전의 현실에서 거대한 시설물을 지어놓고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인했던 연쇄살인마, H. H. 홈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그는 거대한 모텔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했고, 모텔 내 시설물을 이용해 시체를 소각하거나 유독가스를 흘러넣는 등의 살인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수십 혹은 수백명을 살인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법적으로 인정된 것만해도 수십명에 대한 살인행위였습니다.


그는 상기의 문제점-허술하게 지으면 효용이 없고, 너무 거대하게 지으면 소문난다-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을 발주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건설을 중지시키는 일을 반복하여 건설업자를 계속해서 교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체 건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게 하였고, 건설비까지도 줄일 수 있었죠. 물론 격동의 시기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이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말이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오늘


다룰 클리셰는 이야기적인 편의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클리셰라기 보단 연출에 가깝다는 생각도 드네요.


간단히 예를 들어볼게요.


평소부터 맞지 않았던 두 라이벌. 최근에는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하나하나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갈등이 폭발하여 서로 대립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둘의 공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공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두 라이벌 사이에서 불거졌던 갈등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립니다.


익숙하죠? 이 클리셰와 비슷한 클리셰로는 내부의 갈등이 외부의 사건으로 해소된다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하다는 남녀간의 갈등 문제가 스파이 사건으로 해소됩니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유의미하게 작용되고 종료된 케이스라 이후에 다룰 작품과는 다릅니다.


클리셰라 불러도 될 정도로 여러 장르에서 쓰입니다.


가족물에서도, 배틀물에서도, 스릴러물에서도 자주 쓰였죠. 서먹했던 부자가 여러 사건을 거치며 친해진다, 제3의 적과 맞서싸우던 전사들이 친해진다 등등 어떤 주체를 삽입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관계가 서로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워보이고, 고운 놈은 뭘 해도 예뻐 보이죠. 심리적 갈등이 물리적 사건을 겪으며, 서로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인해 이전의 심리적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보자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리고 이것이 이야기적인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에 대한 장치로 활용하는 것도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일이고요.


가장 헛웃음 지으면서 봤던 케이스입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에서 가족, 친구, 연인 문제가 동시에 터졌는데 좀비 습격 한번에 모든 게 해결되었습니다. 고민을 깊이 다루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에 특별한 전환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어서 뭐하냐 싶던 생각이 들었던 에피소드가 있었죠. 시즌3였나... 4였나...


문제는 이것을 무비판적인 차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적인 갈등을 해소하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점은 이겁니다. 갈등이 해소된 이후, 이전의 갈등은 없던 것으로 취급됩니다. 사실 이건 일어나기가 아주 힘든 일이죠.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도 이전의 사유로 인해 헤어짐이 반복되듯,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아주 근본적인 영역에 위치한 것들은 아무리 관계가 변화해도 계속해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 갈등이 이후로도 계속해서 불거질 정도로 이야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처럼 보였을 경우라면 말이죠.


이 클리셰의 가장 큰 비판점은, 갈등사항이 불거지기 이전과 같이 내용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갈등 그 이상의 가치만 있다면 그러한 갈등은 뭉개져도 늘상 무방한 것처럼.


그래서 저는 이 클리셰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때론 그 질조차 변화시킵니다. 캐릭터의 관계의 급변은 자연스레 이야기의 질의 급변을 유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없는 것보다도 좋지 못한 일이죠. 뒤흔었들지만 변화는 없으니 결과적으론 질이 떨어지는 일이 되는 거니까요. 애초 갈등으로 설정하는 것이 관객 혹은 독자가 이전의 마찰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각할 정도로 몰입할 정도의 수위로 설정하곤 하니까요.


연재물, 장기 방영작의 문제와도 어느 정도 맞닿습니다. 어느 정도의 갈등으로는 더 이상 위기감을 조성하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이전에 비해 특히 구분되는 갈등을 설정했다간 이야기를 이어나가기가 힘들고. 그러다보니 갈피를 잃고 이야기의 질도 떨어지는 겁니다.


보통 이러한 클리셰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갈등은 대개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질을 변화시킬 정도라고 여겨집니다.


호러 장르에서 뜬금없이 법률문제가 불거지거나, 판타지 장르에서 리더로서의 책임에 대한 지탄을 받는 등- 이전의 이야기 진행을 위한 갈등과는 근본적인 성질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야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들도 이것이 심상치않은 위기이며, 그만큼 커다란 갈등이라 여기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변혁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기본적인 틀을 마련한 상태에서 미시적인 영역만을 일신하여 지속시키는 것에 비해 손이나 정성이 몇배로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수용자 입장에선 사기당했다라는 생각도 종종 드는 클리셰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돼지 숫자(비공인)


"어린이 여러분~"


"네!'


"오늘은 돼지 소풍 이야기를 할 거예요. 궁금하죠?"


"네~"


"자, 그럼 시작할게요."


"화창한 날이었어요. 엄마 돼지는 아기 돼지 7남매를 데리고 소풍을 갔죠. 김밥도 준비하고, 샌드위치도 준비하고."


"통닭이랑 삼겹살은요?"


"...취사금지 지역이라 그런 건 준비못했어요. 어쨌든 뒷동산에 오르던 엄마돼지는 여덟식구가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뒤로 번호를 외쳤어요."


"뒤로 번호요?"


"첫번째 돼지가 하나라고 외치고, 두번째 돼지가 둘, 세번째 돼지가 셋, 그렇게 순서를 세는 거죠. 장남 돼지가 '하나'하고 소리쳤어요. 그리고 장녀 돼지가 '둘'하고 외쳤죠. 그런데..."


"그런데요~?"


"아무리 반복해도 마지막 숫자가 7이 되는 거예요. 여덟식구가 올라왔는데 숫자를 외치는 돼지는 일곱밖에 없는 거죠. 엄마돼지는 당황했어요. 아무리 둘러보고 살펴봐도 어떤 아기돼지가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던 거죠. 엄마돼지는 소리쳤어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누가 없는 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


그때 귀여운 막내 돼지가 외쳤어요.


"엄마~ 엄마도 숫자에 넣어야 죠!"


그제서야 엄마돼지는 자기 실수를 알게 되었어요. '아차, 내가 숫자를 세다보니 나를 빼놓고 숫자를 세 버렸구나!' 하면서 말이죠. 


"어린이 여러분! 어린이 여러분은 엄마돼지처럼 전체 숫자를 셀 때 자기만 빼고 세면 안되는 거예요, 알겠죠?"


"네에!"






...익숙하죠? 실제로 유치원에서부터 종종 듣는 이야기지만, 정작 특별한 명칭을 붙여서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예전 신해철이 라디오에서 돼지숫자 셌다며 숫자를 세는 주체를 빼먹는 행위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 부분을 이어갑니다.


실생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주변에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많은 경우, 자신 역시 구성원임을 망각하기 좋은 환경이 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전체의 총합은 기억에 남지만 그것을 검산하는 과정 일부는 소실해 버리는 경우 발생하죠.


창작물에서도 자주 활용됩니다. 물론 캐릭터의 급박하거나 다소 모자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만, 백미는 반전을 위해 활용할 때입니다. 다수의 캐릭터 가운데 화면이나 컷 내에서 행동이 묘사되는 캐릭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히 관객이나 독자는 묘사되지 않는 캐릭터 역시 씬 밖에서는 행동이 지속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간주하죠. 이러한 독자나 시청자의 인식의 빈 틈을 파고드는 것이 바로 돼지 숫자입니다.


알포인트는 돼지 숫자를 상당히 세련되게 활용했는데, 전체인원을 사진속 인원과 등치시키며, '사진을 찍은 사람의 숫자'에 바로 관객의 시선이 가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잘 활용한다면 관객의 뒤통수를 훌륭히 때리는 좋은 반전의 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캐릭터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졸책이 될 수 있죠. 그에 따라 의도적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면서도 반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캐릭터도 속지만 관객도 함께 속는 기술적인 재량이 필요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작년


5월에 메모하고 등록한 후 방치하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글을 이어 씁니다.


금일 다룰 클리셰는 평범한 물질이 이질적인 적의 약점이다라는 클리셰입니다. 이 클리셰는 톰 크루즈가 주연한 우주전쟁(세균),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주연한 에볼루션(샴푸의 성분), 멜 깁슨 주연의 싸인(나무)처럼 외계인이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겐 일상적으로 흔한 물질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무해하다는 소리인데,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소리니까요. 자연히 외계인으로 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외계인이 아닌 존재를 대상으로 해서도 얼마든지 해당 클리셰가 작동합니다. 악마라거나 마족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예컨데 아벨탐험대의 마왕 바라모스는 깨끗한 물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꼬비꼬비의 망태할아버지는 착한 아이의 오줌이 약점이었고요. 최초로 자연계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에넬은 고무가 약점이었습니다.


총칼로도 처치하지 못하던 적이 결국 또 다른 지구의 구성원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이것을 자칫 잘못다루면 모든 게 정해져 있었다느니 누군가의 가호를 받느니 하는 식으로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는 다양한 이야기의 구조를 완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클리셰는 보통 익숙한 주제와 합치될 때 비로소 편의성과 집중력을 갖추는데, '평범한 물질이 이질적인 적의 약점' 클리셰는 이 폭이 아주 넓습니다. 이야기적인 반전을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고,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출에서도 활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계도적인 측면에서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보통 이야기는 주인공의 주체적인 행동과 그를 뒷받침 하기 위한 노력, 그를 뛰어넘는 운과 불행 등이 불확정성을 더해주어 독자를 보다 매혹시키고 몰입시킵니다. 강력한 적은 이러한 주인공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통해 위기감을 고조시키죠.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은 강력한 적일 수록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설정하곤 합니다. 이것은 게임 밸런스적 발상이라 종종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편의성 측면도 작용한 결과입니다. 비중의 분산과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일례로 우주전쟁의 세균의 경우, 우주라는 넓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고, 그들끼리 작용하기에 오직 인간만이 우주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한다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사용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의 바라모스는 우리 모두 물을 깨끗하게 사용해서 그를 통해 마왕을 물리치자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끌어왔습니다. 원피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주인공을 부각시키고 세계의 확대를 표현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끌어왔고요. 이 외에도 인간의 의지보단 우연이나 더 큰 무언가의 의도가 녹아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의 연출을 위해 위 클리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상속에서 흔히 놓치고 있는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로 소화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는 그만의 의미가 있다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요.


싸인은 하필이면 나무와 물이 약점입니다. 물이 표면의 70프로 이상인 지구에, 온갖 식물로 둘러져 있는 농장에서 저 둘이 약점인 외계인이 나오지 영화의 만듦새와는 상관없이 작위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죠.


엇비슷한 클리셰로는 아무 생각없이 갖고 있었던 물건이 사실 적에게 치명적인 물건이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주셨던 목걸이의 보석이 사실 적을 물리치는 보석이더라~ 생계를 위해 사고파는 마약이 사실 괴물을 물리치는 물질이었다더라(영화 패컬티)~ 등등 물건의 평범함이 작용하지 않거나 말 그대로 우연성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알고봤더니 적의 약점이더라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의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어찌되었건 이만큼물론 상당히 낡은 클리셰다보니 지금 와선 적잖게 비판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장 우주전쟁의 경우 "신체구성요소부터 다른 외계인에게 지구의 세균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당대 과학잡지에서 이야기되기도 했었고, 싸인은 "딴 건 다 웃고 넘기겠다. 근데 대기 중 수증기는?"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었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들도 일찍부터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저것이 주인공과 엮이고 주인공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은 후, 비로소 터져나온다는 것에 대해 작위적이라 비판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익숙하죠?


여러 연애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클리셰입니다. 따로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굳이 설명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호감은 있지만,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남녀가 있습니다. 남성 캐릭터는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져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여자 캐릭터는 겉으로는 드세지만 사실 속으로는 섬세하여 상처받을까 그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주변을 머물기만하던 그 때, 우연히 남자 캐릭터가 발이 걸려 넘어지며 여성 캐릭터 위로 쓰러지게 되고 우연히 입술을 마주하게 됩니다. 의도치 않은 신체적 접근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이런 저런 계기가 되고 이후 알콩달콩....


단순히 장난치다 뒷 사람에게 부딪혀 입을 맞추는 정도는 서양의 작품에서도 간간히 볼 수 있는 것이긴 한데, 넘어지는 정도로 움직임이 큰 가운데 사고로 입을 맞추는 장면은 재패니메이션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 부딪혀 넘어졌는데 부딪힌 사람이 전교회장이더라... 류의 클리셰의 변형인 걸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 정말로 익숙하죠?


보통 영화나 드라마보다는 만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클리셰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죠. 입술은 신체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고, 치아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또 인간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하고, 또 안면에서 가장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다름아닌 코니까요. 두 사람이 넘어지면서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는 반사적으로 서로 가장 단단한 부분을 맞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 이마끼리 박치기 말이죠. 


넘어지면서 키스한다는 건 신체구조와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과정에서의 신체 움직임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실제 인간이 저러한 움직임을 하면 너무나 어색해 보이는 거죠.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 컨트롤을 잃는다는 의미인데, 키스는 사실 너무나도 섬세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라도, 필연적으로 머리 움직임은 다른 신체에 비해 느리고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이나 자세의 흐름을 왜곡할 수 있는 만화에서 더욱 자주 이용되는 클리셰인 이유입니다.




물론 두 사람이 넘어지면서 입술을 마주댈 확률이 전무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엇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고요. 다만, 입술만 마주치고 마는 수준의 충돌이 아닐 거라는 게, 그리고 인간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얼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문제죠.


물론 미남이시네요의 박신혜와 장근석, 금옥만당에서 장국영과 원영의 등 실사 작품이라 하더라도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작품에서도 애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입술만 부딪히지 않았지 사고로 인해 신체접촉이 일어나 얼굴을 가까이 한 두 사람 사이에 성적 긴장감이 일어나는 경우는 경우는 이보다도 마일드한 분위기의 작품은 물론, 훨씬 농염한 장르에서도 얼마든지 활용되곤 합니다.


물론 어색하긴 합니다만, 화면을 어떻게 잡느냐, 구도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냐 등등을 따져보면 얼마든지 실사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또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어색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진 못하지만.


이 클리셰는 단연코 캐릭터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의 변화를 위해서 자주 애용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가까워지는 것도 가능하고, 반대로 멀어지는 것도 가능합니다. 계기로 자주 이용되는 클리셰라는 거죠. 이 클리셰를 정말로 애용했던 것이 아카마츠 켄의 러브 히나라는 작품인데 다양한 변주가 등장합니다. 키스 외에 다른 신체적 접촉도 있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에 들어가기도 하고, 관계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요.


애용되는 클리셰지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독자들도 여기고 있기 때문에 가벼운 러브 코미디 장르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족인데, 글을 입력만해놓고, 등록은 이제서야 합니다.


그런데 자그마치 2년 전에 등록했던 글이었네요. 애초에 무슨 작품을 보고 이런 글을 쓰게 된 건지에 대해서도 완전히 까먹었습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글이...


두 번 정도 날아간 다음에 다시 쓰는 글입니다. 윈도우 업데이트로 한 번, 다른 한 번은 도통 뭔 이유 때문에 날아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엔 임시저장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이런 일이 벌어져도 다시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최근엔 왜인지 저 기능이 작동을 하질 않네요. 거 참...


여하튼 금일의 클리셰는 자그마한 노인이 사실 엄청난 강자였다입니다.


오늘 날 격투기는 지극히 기존의 경험을 데이터화하여 그것이 보다 선수에게 효과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현대기술의 총아에 가깝습니다. 부상에서 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부상을 최대한 적게 받고,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타격은 높이고, 상대의 기술에 대응하고, 그 마음가짐이 어떠한 것이 더 효과적인지, 호흡은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등등에 대해 정형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스포츠학은 물론 의학에서부터 심리학, 심지어는 철학에 물리학까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격투기 선수지만, 그 선수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데엔 이러한 이러한 제반사항을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자그마한 노인이 사실 엄청난 강자라는 클리셰는 그리 현실성이 없는 것입니다만, 동시에 왜 저런 클리셰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도 되어 줍니다.


오늘 쓸 글의 발단이 되었던 스타워즈의 요다. 포스 그 자체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오늘 날 인간의 육체는 20~40 시점에 가장 강인하다 흔히 알려져 있고, 실제로 스포츠 스타의 전성기는 종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적절한 경험과 육체적 강인함이 최적의 시너지를 발휘하는 20~30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성기에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던 이라도, 늙고 쇠약해지면 일반인보다는 뛰어날 지언정 이전에 비할 수는 없게 되는 거죠. 사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새삼 언급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고 자그마한 존재가 엄청난 강자로 나오는 콘텐츠의 숫자는 적지 않습니다. 스타워즈의 요다가 그렇고, 란마의 핫포사이가 그렇고, 공태랑 나가신다의 전선도 그렇고, 쿵후보이 친미나 권법소년의 노인 고수들, 헌터X헌터의 회장, 은혼의 야규가의 할아버지, 그리고 무협지의 무수한 노인 초고수들도 그러합니다.


이는 경험이 충분히 검증할 정도로 데이터화되어 쌓이지 않은 사회 시스템 하에서, 개인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노인 무술가가 지닌 자기만의 요령과 비법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선망으로 인한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환상은 지금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죠. 강함이 경험(내지 수련)과 정비례하도록 설정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육체가 노쇠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둔감하게 작용하는 성질이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나이를 먹고 약해지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젊고 어리기만한 이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일종의 박탈감이 작용하기도 할 거고요.


특히 격투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성장이 주요한 소재일 수밖에 없는데, 왕년의 고수가 지금은 약해졌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를 했다간, 주인공의 노화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구성하기가 더 까다로운 것도 사실이고요.


핫포사이와 코롱 할머니. 작중 최강자들입니다. 물론 코미디 장르다보니 그게 부각되지는 않죠.


이러한 연유로 인해, 단순히 육체적인 요소만이 강함에 반영되지 않는 설정이 가미되곤 합니다. 일례로 아예 초인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어 노화로 인한 약화가 반영되지않는 사상최강의 제자 켄이치와 같은 사례도 있고, 스타워즈의 요다나 헌터X헌터의 회장처럼 육체적인 강함이 아닌 넨이나 포스와 같은 요소가 결부되어 있거나, 권법소년처럼 육체의 노화로 인한 약화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늦출 수 있으며 꾸준한 노력과 수련은 이러한 육체의 노화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절기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래곤볼의 무천도사나 페어리테일의 마카로프처럼 육체 자체가 거대해지는 경우도 존재하기도 하고요. 물론 란마처럼 코미디의 성격이 짙어 이러한 육체적인 노쇠가 묵직하게 다뤄지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노인 캐릭터를 강자로 만들었을 때 일종의 반전 효과를 통해 이야기에 신선함을 불어넣을 수 있고, 캐릭터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을 통해 보다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며, 무엇보다도 나이듦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낮출 수 있다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글 아이디어 노트에서 컴퓨터로 옮긴 후 한달만에 완성하네요. 두번이나 날아가고 나니 쓰기가 싫어져서.... 지금도 허겁지겁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이번에


다룰 클리셰는 본류가 되는 콘텐츠가 너무 유명해서 클리셰를 넘어 오마주나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보아야 할 정도입니다. 한 때 차용하여 장르적 특성으로 거듭날 정도가 되는가 하는 생각도 갖게 만들었지만, 원형이 되는 콘텐츠의 영향력이 너무나 길게 이어져 해당 연출 자체에 원작의 성격이 계속해서 잔존하여 해당 연출을 차용하고서 따로 독창성을 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거죠. 그렇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짧은 그 시기에 클리셰로 활용된 전적이 있기에, 다루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오늘 다뤄볼 클리셰는 '전투 중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클리셰로는 '드래곤볼'에서 나온 '초사이어인'이 가장 유명합니다. 파워업을 특정한 이벤트를 통해 이뤄지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한다면, 단연 드래곤볼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요. 또한 현 시점에선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를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28이라는 숫자가 제겐 각별한데 손오공이 초사이어인 상태로 프리더와 맞붙는 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28만 보면 설렙니다.


물론 드래곤볼에서는 초사이어인에 앞서 계왕권처럼 붉은색으로 오라와 머리색이 바뀌는 연출이 존재했고, 드래곤볼 이전에도 파워업하면 몸에서 오라가 치솟으며 그 오라에 머리색 등이 물드는 듯한 연출은 소년 만화 내에도 엄연히 존재했었습니다. 일례로 근육맨의 스쿠루는 머리털이 없지만 눈동자색이 변하는 연출이 있었죠.


하지만 슈퍼사이어인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확연한 외형적 변화가 뒤따랐고, 순간적인 기세 정도로 치부되던 것을 명백한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벤트와 결부시키며 파워업 그 자체를 순수한 연출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앞으로의 액션이나 이야기의 전개만이 아니라, 아예 캐릭터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뒤바꾼 거죠. 손오공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대변되던 캐릭터이다 이후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대변되는 캐릭터로 바뀐 것처럼요. 결과적으로 슈퍼사이어인을 소개한 드래곤볼은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의 변신 연출을 확립해낸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이것은 여러 작품에서 차용되어 활용되었습니다.


예전 드래곤볼이 90년대 한국만화에 끼친 영향에서도 드래곤볼이 끼쳤던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던 바 있고, 당시에도 그 이야기의 중심은 단연 슈퍼사이어인이었습니다.


붉은매의 캐릭터를 두고 초사이어인 로제니 블루의 예언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필연입니다. 90년대 초중반 소년만화계 분위기가 어땠냐면 파워업하면 머리색 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는 식이었고, 붉은매나 지금의 드래곤볼 슈퍼나 완전히 같은 인식으로 캐릭터에 변화를 줬습니다.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닮은 모양으로 도출된 거죠.


이 클리셰가 이용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확연히 눈에 드러나는 파워업 이벤트를 전투중에 치룰 수 있다는 간편성, 그리고 명백히 인식되는 캐릭터의 변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표현의 경제성입니다.


이전에도 피땀어린 수련을 통해 머리가 하얗게 세는 등 캐릭터의 능력의 변화가 외형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존재했었습니다. 캐릭터의 각성과 본질적인 성격의 변화라는 측면에선 넓게 보아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의 한 갈래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투중 이러한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도식을 한 번의 전투를 통해서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집니다. 연재물은 그 특성상 몰입의 그 순간을 위해 중언부언을 꺼리고 속도감있는 전개를 지향하죠. 그러한 측면에서 전투 중 머리색이 변하는 것이 파워업을 나타내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강점을 가집니다.


슈퍼사이어인을 오마주한 슈퍼 소닉. 사실 이 쪽은 파워업했더니 몸이 빛나더라, 파워업했더니 머리 카락 외에 다른 부분의 색도 바뀌더라 클리셰에도 포함됩니다.


둘째로는 캐릭터의 변화가 확연하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도 물론 괴물로 변하거나, 뛰어난 무기나 장비를 하는 것을 통해 외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표현이 더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고, 전자는 따라하고픈 변신이라는 측면에선 궤가 벗어나 있었으며, 후자는 캐릭터의 본질적인 변화나 파워업이라고 말하기엔 무색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머리색은 단시간 내엔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특히 그림에서는 캐릭터의 개성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변화시켜 이 파워업이 캐릭터의 본질적인 변화이며 캐릭터의 개성도 달라졌음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변화의 폭이 아예 기존의 캐릭터와는 인식을 달리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아, 일종의 색놀이로서의 흥미를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반복되면 상당히 지루한 느낌을 줍니다다만, 이거야 오늘 다룰 이야기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쥐라기 월드컵에도 나옵니다. 애초에 쥐라기 월드컵을 보노라면 드래곤볼의 영향을 꽤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죠. 여하튼 여기에 나오는 늑대 로보는 경기에 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황금늑대로 변하고 몸집도 커집니다. 초사이어인을 염두에 둔 거죠.


무협만화에 말을 그리지 않는다거나, 화려한 복식이나 갑옷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첫번째로는 맨몸으로 액션을 하는 것이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며, 둘째로는 인간을 그리는 것에 비해 손이 몇배로 간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그에 수반된 부가적이 묘사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머리색이 변하는 파워업도 근본적으로는 같습니다. 기존 연출 방법대로 따르면서도, 머리색의 변화 정도만을 표현하여 상황이 달라졌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드래곤볼도 슈퍼사이어인을 하고났더니 먹칠을 하지 않아 좋았다같은 류의 농담이 나돌기도 하죠.


블리치의 무월은 밝은 색이 기본형인 상태에서 어두운 색으로 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연출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볼이 현역으로 계속해서 활약했고, 더 나아가 후속작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드래곤볼로서의 색체가 너무 강한 방식의 변신은 지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식은 완전히 같지만 몸에서 오라만 뿜어져 나온다거나, 머리색이 변하긴 변하는데 노란색은 아니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초사이어인 자체가 드래곤볼의 아이콘화된 상황이고, 또 앞으로 십수년 아니 수십년은 우려먹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이것은 인용의 대상은 되겠지만, 이전의 클리셰처럼 차용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몇몇 공식은 비틀어 계속해서 이용될 것이라고 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이번에


다룰 클리셰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아마 나루토 등에서 가장 자주 본 장면일 겁니다. 두 팔을 벌리고 달리는 장면 말입니다. 실제로 이걸 두고 일종의 농담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고, 이걸 두고 나루도 달리기, 닌자 달리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연출되는 장면이 클리셰화되어 굳어진 것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만화 작가들이 그것을 답습하고, 그것을 또 애니메이션이 강화하여 강조해 연출하다 아예 일종의 스타일로 굳어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가 이용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화의 연출이 애니메이션으로 따라온 것, 둘째는 개성 포인트 강조, 셋째는 연출의 경제성을 위함입니다.


아라레의 달리는 모습은 이미 아이콘이죠. 물론 저렇게 달리는데엔 등신대의 역할도 컸을 겁니다. 2.5에서 3등신이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한 배를 둔 형제같은 사이기는 합니다만, 동화와 원화인 만큼 완전히 동일한 콘텐츠는 아닙니다. 컷 안에서 완성되는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장면의 흐름 속에서 해당 장면을 소화해야 하죠. 이를 위해 연출을 각색하는데, 때론 만화의 인상적인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오기도 합니다.


만화는 그 특성상 상반신에 주로 포인트가 맞추어 집니다. 말풍선, 캐릭터의 표정, 움직임이나 행동 등등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려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죠. 필연적으로 상반신만으로 입체감과 속도감을 드러내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현실과는 다른 방식의 만화적 연출을 통해 구도를 잡습니다. 마치 몸이 너무 빨리 움직여 팔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과정을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양팔은 뒤로 밀리는 것 혹은 벌어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두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도 한 장면 안에 효과적으로 표현되고요. 


사진 혹은 움직이는 사진으로 본다면 상당히 어색한 장면입니다만, 그림과 사진은 차이가 있어, 이러한 연출은 애니메이션에선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클리셰로 자리잡게 되었고요.


 

정면샷으로는 별다른 이질감을 못느낍니다.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측면 아래에서 위 그리고 같은 자세로 달리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이질감은 심해집니다. ...뭐. 원리는 사이클처럼 상체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달린다는 거겠지만 말이죠.


둘째로는 개성의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닥터 슬럼프의 아라레처럼 귀엽고 웃기기 위한 케이스도 있고, 대운동회의 토모에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표현하기 위함도 있겠고, 드래곤 리그의 야크처럼 속도를 중시한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습니다. 나루토의 경우처럼 닌자의 고유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도 있겠고요.


결국 이 또한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한 요소인데, 특이하게 정면이 아니라 측면, 그리고 전신이 다 나오는 경우에도 팔을 벌리고 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상기한 예들 가운데 아라레는 유아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마치 비행기를 흉내내는 듯한 장난스러운 몸짓이고, 토모에는 말 그대로 제트기류(!)를 발생시키기 위해 양력을 받으려 팔을 벌리는 것이니 뒤의 것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들의 경우는 말 그대로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수련을 통해 스타일화 된 케이스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게다 수련법과 일정부분 닮아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굽이 아주 높은 게다 위에 올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 그 쓰러지는 힘을 받게 되고, 다리는 끊임없이 움직여 평소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진짠가?)는 것을 만화적으로 표현한 거죠. 실제로는 그러한 게다 수련법에서도 양 팔은 끊임없이 앞뒤로 움직이며 균형을 잡습니다만. 여하튼 머리를 앞으로 한 상태에서 양 팔을 뒤로 뻗으면 빨라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찌되었건 사실입니다. 시각적인 효과때문인지 아니면 반복된 연출로 인한 학습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위 게다 수련법 때문인지 이러한 연출을 특히 닌자물에서 자주 보여집니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팔조차 몸의 움직임을 못쫓아간다는 식으로 연출됩니다. 물론 진격의 거인에서는 달리기에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만 원리는 같습니다. 결국 속도감을 나타내기 위한 시각적인 요소가 고려되었다는 거죠. 대운동회의 라리같은 캐릭터가 스텔스 형으로 헤어스타일을 갖춘 경우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에반게리온과 같은 메카물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로봇이기에 보다 덜 이질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죠.


마지막은 연출의 경제성입니다. 생각해보시면 위 장면은 특히 대화 때 자주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체는 대화를 위해 앞으로 숙였다는 점 외엔 특이할 게 없지만, 다리는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이러한 상체와 하체의 분리는 이야기의 진행과 캐릭터의 이동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연출적인 측면에서 꽤나 경제적이죠. 이야기의 흐름을 대사로 잡아주면서, 이동의 과정을 묘사하여 나름대로의 현실성을 부여해줍니다.


동시에 이러한 달리기는 팔을 앞뒤로 움직이는 것보다도 연출이 쉬울 뿐더러, 시청자가 팔이 움직이는 것에 주목하여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만들며, 동시에 팔이 왔다갔다 하는 장면을 붙여넣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상하의 움직임만 고려하여 적은 컷으로 연출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동화 자체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거죠.


이누야샤도 양 팔을 벌린 채 달리는 캐릭터가 많이 나옵니다. 다카하시 루미코라는 작가 자체가 특정 포즈를 자주 활용하기도 합니다만, 애니메이션도 동일하게 나아간 건 결국 저 펄럭거리는 옷감이 왔다갔다하면 표현하기가 너무 귀찮아지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달리는 게 정체성인 코우가같은 캐릭터는 복장 자체가 상당히 가볍죠.


물론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러한 연출은 일본 애니메이션(그리고 그에서 짙게 영향을 받은 콘텐츠들)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도 빠른 속도감이나 캐릭터의 이동과 내용의 진행과 정리를 동시에 수행하기도 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오늘


다룰 클리셰는 어느 정도 유행이 지나간, 그것도 소년만화 등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클리셰입니다. 하지만 제한적으로 일부 연출에서만 작용하는 클리셰와 달리 아예 이야기의 구조적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클리셰이기에, 오늘 한 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쥐라기 월드컵(드래곤 리그)의 주인공 돌발이의 아버지 대포는 작은 드래곤으로 모습이 변하게 되며 조언자+해설자+개그캐릭터+마스코트 캐릭터로 거듭났습니다. 본래 모습보다 저 드래곤 모습이 훨씬 익숙할 겁니다.



오늘의 클리셰는 '저주를 받아 아버지의 모습이 변했다' 입니다. 물론 저주는 마법이나 사고 등등으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는 흔히 소년만화 등지에서 사용되는 아버지 캐릭터의 역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작물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은 크게 다섯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경쟁자로서의 목표, 이상적인 지향점, 버티고 선 제방과도 같은 보호자, 지나가버린 영광의 시절, 극복해야 하는 과거가 대표적입니다.


로봇전사 감마(원기폭발 간바루가)에서 모습이 변한 아버지는 특이 케이스로 분류될 수 있을 겁니다. 개가 됐고, 개그캐릭터로 기능하고, 또 조언자로 작용합니다. 근데 본신의 실력 덕분에 개인상태로도 상당히 활약합니다. 메카물에서 닌자액션을 보여주죠.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 캐릭터상 외형이건 내면이건 주인공과 닮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인공+더해진 시간이라는 어찌보자면 주인공의 발전형인 모습을 취하곤 합니다.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같은 정도의 비중을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주인공이 아닌 아버지의 캐릭터에게 옮겨가게 됩니다. 그에 따라 아버지의 캐릭터가 작중 주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한이 가해지게 되는데, 그 여러 사유 중 하나가 저주를 받아 아버지의 모습이 변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강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저주로 인해 제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죠. 이 경우는 지나가버린 영광의 시절(멀쩡했던 시절의 아버지) 클리셰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아버지를 주인공의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구조적인 이야기적 목표까지 설정할 수 있죠.


4차원탐정 똘비(시공탐정 겐시군)에선 아버지 캐릭터가 돌도끼가 됩니다. 본래 모습이었다면 귀여움을 어필하는 작품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지 않았겠죠. ...으음?


이는 첫번째로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의 설정이 제시되지 않고서도 아버지를 구한다는 목표를 쉽게 설정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며, 또한 마스코트적 캐릭터의 존재에 대한 당위성과 그러한 캐릭터가 낭비되지 않고 적절히 이야기에 기능하도록 한다는 장점 역시 가집니다. 셋째로는 아버지가 보호의 대상이 되면서 자식세대와 뒤집힌 관계도가 설정되어 독특한 코미디가 성립된다는 점입니다.


즉, 아버지로서의 위엄과 매력은 보여야 하지만, 결코 주인공보다도 활약해서는 안된다는 아버지 캐릭터의 유형을 잘 설명해주는 클리셰죠.


마법사의 아들 코리의 아버지는 밤에는 부엉이로 변하고, 낮에는 인간의 모습인 상태입니다만, 본래의 마법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작중 기능은 위의 캐릭터들과 대동소이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자주받아 모습이 변한 아버지는 이야기적으로 크게 다섯가지 기능을 가집니다. 첫째로 아버지라는 주인공보다도 명백히 강자인 포지션의 캐릭터가 사건 해결에 직접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자라는 포지션은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아  조언과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모습이 변한 아버지 캐릭터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목적의식을 설정하고, 넷째로 이러한 인질로 작용하는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한 이야기적 구조를 형성합니다. 다섯째로 대를 이은 이야기로 이야기적인 확장을 이뤄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오늘


다룰 클리셰 역시 여러 장르에서 넓게 사용되는 클리셰 입니다. 일례로 얼마 전 보았던 살인마에게 복수하는 호러 영화의 주인공도 이것을 보여줬고, 액션 자체가 주류가 되는 드래곤볼이나 세인트 세이야같은 소년만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SF영화의 걸작인 블레이드러너에서도 데커드에게 동료를 잃은 레플리컨트가 그에게 복수하며 비슷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죠.


이 클리셰는 보통 과거의 원한이나, 핍박받던 동료들의 복수를 트리거로 등장합니다. 부당한 상황을 타개해내는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을 계속해서 억압하는 악당에게 공격하는 것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죠.


단순히 주인공의 반격이라는 선을 넘어, 주인공이 가하는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권선징악이라는 틀 아래 악당이 공격받는 분명한 이유를 드러나게 하여 이야기적인 당위를 형성합니다. 이야기의 발단부의 일을 절정부와 연결시켜 그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이죠.


이 클리셰는 대개 분노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표출됩니다. 적을 공격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황에 대해 위 대사를 통해 방향성과 성격을 부여하여 이야기의 드라마를 부여하는 것이죠. 이야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단조로워질 수 있는 장면에 개성을 부여하여 색다른 인상을 받도록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내퍼의 몫! 이라며 패러디한 만화를 어디서 봤었는데...


사실 이 클리셰는 지금에 와선 너무 보편적이 되어서 보다 트렌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어느 정도 피하는 연출이 되었습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나 고스트 스위퍼의 루나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뒤섞어 웃음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아예 정말 중요하지도 않은 것만 나열하며 등장인물의 성격을 부각하는 방식의 연출 등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소년만화 등의 장르에선 여전히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느와르 장르처럼 원한관계와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경우엔 여전히 애용받는 클리셰입니다만, 이제는 대사로 일일히 설명해주는 것조차 다소 유치하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설사 등장인물이 저렇게 생각을 하더라도 입으로는 내뱉지 않게 바뀌고 있습니다. 차라리 회상씬을 넣거나, 과거의 동료를 상징하는 다른 물건 혹은 무기를 사용하거나 하는 식으로 소화를 하면 했지.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