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룰 클리셰는 본류가 되는 콘텐츠가 너무 유명해서 클리셰를 넘어 오마주나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보아야 할 정도입니다. 한 때 차용하여 장르적 특성으로 거듭날 정도가 되는가 하는 생각도 갖게 만들었지만, 원형이 되는 콘텐츠의 영향력이 너무나 길게 이어져 해당 연출 자체에 원작의 성격이 계속해서 잔존하여 해당 연출을 차용하고서 따로 독창성을 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거죠. 그렇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짧은 그 시기에 클리셰로 활용된 전적이 있기에, 다루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오늘 다뤄볼 클리셰는 '전투 중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클리셰로는 '드래곤볼'에서 나온 '초사이어인'이 가장 유명합니다. 파워업을 특정한 이벤트를 통해 이뤄지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한다면, 단연 드래곤볼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요. 또한 현 시점에선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를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28이라는 숫자가 제겐 각별한데 손오공이 초사이어인 상태로 프리더와 맞붙는 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28만 보면 설렙니다.


물론 드래곤볼에서는 초사이어인에 앞서 계왕권처럼 붉은색으로 오라와 머리색이 바뀌는 연출이 존재했고, 드래곤볼 이전에도 파워업하면 몸에서 오라가 치솟으며 그 오라에 머리색 등이 물드는 듯한 연출은 소년 만화 내에도 엄연히 존재했었습니다. 일례로 근육맨의 스쿠루는 머리털이 없지만 눈동자색이 변하는 연출이 있었죠.


하지만 슈퍼사이어인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확연한 외형적 변화가 뒤따랐고, 순간적인 기세 정도로 치부되던 것을 명백한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벤트와 결부시키며 파워업 그 자체를 순수한 연출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앞으로의 액션이나 이야기의 전개만이 아니라, 아예 캐릭터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뒤바꾼 거죠. 손오공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대변되던 캐릭터이다 이후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대변되는 캐릭터로 바뀐 것처럼요. 결과적으로 슈퍼사이어인을 소개한 드래곤볼은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의 변신 연출을 확립해낸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이것은 여러 작품에서 차용되어 활용되었습니다.


예전 드래곤볼이 90년대 한국만화에 끼친 영향에서도 드래곤볼이 끼쳤던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던 바 있고, 당시에도 그 이야기의 중심은 단연 슈퍼사이어인이었습니다.


붉은매의 캐릭터를 두고 초사이어인 로제니 블루의 예언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필연입니다. 90년대 초중반 소년만화계 분위기가 어땠냐면 파워업하면 머리색 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는 식이었고, 붉은매나 지금의 드래곤볼 슈퍼나 완전히 같은 인식으로 캐릭터에 변화를 줬습니다.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닮은 모양으로 도출된 거죠.


이 클리셰가 이용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확연히 눈에 드러나는 파워업 이벤트를 전투중에 치룰 수 있다는 간편성, 그리고 명백히 인식되는 캐릭터의 변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표현의 경제성입니다.


이전에도 피땀어린 수련을 통해 머리가 하얗게 세는 등 캐릭터의 능력의 변화가 외형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존재했었습니다. 캐릭터의 각성과 본질적인 성격의 변화라는 측면에선 넓게 보아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의 한 갈래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투중 이러한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도식을 한 번의 전투를 통해서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집니다. 연재물은 그 특성상 몰입의 그 순간을 위해 중언부언을 꺼리고 속도감있는 전개를 지향하죠. 그러한 측면에서 전투 중 머리색이 변하는 것이 파워업을 나타내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강점을 가집니다.


슈퍼사이어인을 오마주한 슈퍼 소닉. 사실 이 쪽은 파워업했더니 몸이 빛나더라, 파워업했더니 머리 카락 외에 다른 부분의 색도 바뀌더라 클리셰에도 포함됩니다.


둘째로는 캐릭터의 변화가 확연하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도 물론 괴물로 변하거나, 뛰어난 무기나 장비를 하는 것을 통해 외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표현이 더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고, 전자는 따라하고픈 변신이라는 측면에선 궤가 벗어나 있었으며, 후자는 캐릭터의 본질적인 변화나 파워업이라고 말하기엔 무색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머리색은 단시간 내엔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특히 그림에서는 캐릭터의 개성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변화시켜 이 파워업이 캐릭터의 본질적인 변화이며 캐릭터의 개성도 달라졌음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변화의 폭이 아예 기존의 캐릭터와는 인식을 달리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아, 일종의 색놀이로서의 흥미를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반복되면 상당히 지루한 느낌을 줍니다다만, 이거야 오늘 다룰 이야기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쥐라기 월드컵에도 나옵니다. 애초에 쥐라기 월드컵을 보노라면 드래곤볼의 영향을 꽤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죠. 여하튼 여기에 나오는 늑대 로보는 경기에 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황금늑대로 변하고 몸집도 커집니다. 초사이어인을 염두에 둔 거죠.


무협만화에 말을 그리지 않는다거나, 화려한 복식이나 갑옷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첫번째로는 맨몸으로 액션을 하는 것이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며, 둘째로는 인간을 그리는 것에 비해 손이 몇배로 간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그에 수반된 부가적이 묘사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머리색이 변하는 파워업도 근본적으로는 같습니다. 기존 연출 방법대로 따르면서도, 머리색의 변화 정도만을 표현하여 상황이 달라졌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드래곤볼도 슈퍼사이어인을 하고났더니 먹칠을 하지 않아 좋았다같은 류의 농담이 나돌기도 하죠.


블리치의 무월은 밝은 색이 기본형인 상태에서 어두운 색으로 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연출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볼이 현역으로 계속해서 활약했고, 더 나아가 후속작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드래곤볼로서의 색체가 너무 강한 방식의 변신은 지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식은 완전히 같지만 몸에서 오라만 뿜어져 나온다거나, 머리색이 변하긴 변하는데 노란색은 아니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초사이어인 자체가 드래곤볼의 아이콘화된 상황이고, 또 앞으로 십수년 아니 수십년은 우려먹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이것은 인용의 대상은 되겠지만, 이전의 클리셰처럼 차용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몇몇 공식은 비틀어 계속해서 이용될 것이라고 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이번에


다룰 클리셰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아마 나루토 등에서 가장 자주 본 장면일 겁니다. 두 팔을 벌리고 달리는 장면 말입니다. 실제로 이걸 두고 일종의 농담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고, 이걸 두고 나루도 달리기, 닌자 달리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연출되는 장면이 클리셰화되어 굳어진 것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만화 작가들이 그것을 답습하고, 그것을 또 애니메이션이 강화하여 강조해 연출하다 아예 일종의 스타일로 굳어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가 이용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화의 연출이 애니메이션으로 따라온 것, 둘째는 개성 포인트 강조, 셋째는 연출의 경제성을 위함입니다.


아라레의 달리는 모습은 이미 아이콘이죠. 물론 저렇게 달리는데엔 등신대의 역할도 컸을 겁니다. 2.5에서 3등신이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한 배를 둔 형제같은 사이기는 합니다만, 동화와 원화인 만큼 완전히 동일한 콘텐츠는 아닙니다. 컷 안에서 완성되는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장면의 흐름 속에서 해당 장면을 소화해야 하죠. 이를 위해 연출을 각색하는데, 때론 만화의 인상적인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오기도 합니다.


만화는 그 특성상 상반신에 주로 포인트가 맞추어 집니다. 말풍선, 캐릭터의 표정, 움직임이나 행동 등등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려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죠. 필연적으로 상반신만으로 입체감과 속도감을 드러내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현실과는 다른 방식의 만화적 연출을 통해 구도를 잡습니다. 마치 몸이 너무 빨리 움직여 팔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과정을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양팔은 뒤로 밀리는 것 혹은 벌어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두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도 한 장면 안에 효과적으로 표현되고요. 


사진 혹은 움직이는 사진으로 본다면 상당히 어색한 장면입니다만, 그림과 사진은 차이가 있어, 이러한 연출은 애니메이션에선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클리셰로 자리잡게 되었고요.


 

정면샷으로는 별다른 이질감을 못느낍니다.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측면 아래에서 위 그리고 같은 자세로 달리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이질감은 심해집니다. ...뭐. 원리는 사이클처럼 상체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달린다는 거겠지만 말이죠.


둘째로는 개성의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닥터 슬럼프의 아라레처럼 귀엽고 웃기기 위한 케이스도 있고, 대운동회의 토모에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표현하기 위함도 있겠고, 드래곤 리그의 야크처럼 속도를 중시한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습니다. 나루토의 경우처럼 닌자의 고유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도 있겠고요.


결국 이 또한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한 요소인데, 특이하게 정면이 아니라 측면, 그리고 전신이 다 나오는 경우에도 팔을 벌리고 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상기한 예들 가운데 아라레는 유아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마치 비행기를 흉내내는 듯한 장난스러운 몸짓이고, 토모에는 말 그대로 제트기류(!)를 발생시키기 위해 양력을 받으려 팔을 벌리는 것이니 뒤의 것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들의 경우는 말 그대로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수련을 통해 스타일화 된 케이스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게다 수련법과 일정부분 닮아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굽이 아주 높은 게다 위에 올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 그 쓰러지는 힘을 받게 되고, 다리는 끊임없이 움직여 평소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진짠가?)는 것을 만화적으로 표현한 거죠. 실제로는 그러한 게다 수련법에서도 양 팔은 끊임없이 앞뒤로 움직이며 균형을 잡습니다만. 여하튼 머리를 앞으로 한 상태에서 양 팔을 뒤로 뻗으면 빨라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찌되었건 사실입니다. 시각적인 효과때문인지 아니면 반복된 연출로 인한 학습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위 게다 수련법 때문인지 이러한 연출을 특히 닌자물에서 자주 보여집니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팔조차 몸의 움직임을 못쫓아간다는 식으로 연출됩니다. 물론 진격의 거인에서는 달리기에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만 원리는 같습니다. 결국 속도감을 나타내기 위한 시각적인 요소가 고려되었다는 거죠. 대운동회의 라리같은 캐릭터가 스텔스 형으로 헤어스타일을 갖춘 경우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에반게리온과 같은 메카물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로봇이기에 보다 덜 이질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죠.


마지막은 연출의 경제성입니다. 생각해보시면 위 장면은 특히 대화 때 자주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체는 대화를 위해 앞으로 숙였다는 점 외엔 특이할 게 없지만, 다리는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이러한 상체와 하체의 분리는 이야기의 진행과 캐릭터의 이동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연출적인 측면에서 꽤나 경제적이죠. 이야기의 흐름을 대사로 잡아주면서, 이동의 과정을 묘사하여 나름대로의 현실성을 부여해줍니다.


동시에 이러한 달리기는 팔을 앞뒤로 움직이는 것보다도 연출이 쉬울 뿐더러, 시청자가 팔이 움직이는 것에 주목하여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만들며, 동시에 팔이 왔다갔다 하는 장면을 붙여넣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상하의 움직임만 고려하여 적은 컷으로 연출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동화 자체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거죠.


이누야샤도 양 팔을 벌린 채 달리는 캐릭터가 많이 나옵니다. 다카하시 루미코라는 작가 자체가 특정 포즈를 자주 활용하기도 합니다만, 애니메이션도 동일하게 나아간 건 결국 저 펄럭거리는 옷감이 왔다갔다하면 표현하기가 너무 귀찮아지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달리는 게 정체성인 코우가같은 캐릭터는 복장 자체가 상당히 가볍죠.


물론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러한 연출은 일본 애니메이션(그리고 그에서 짙게 영향을 받은 콘텐츠들)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도 빠른 속도감이나 캐릭터의 이동과 내용의 진행과 정리를 동시에 수행하기도 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오늘


다룰 클리셰 역시 여러 장르에서 넓게 사용되는 클리셰 입니다. 일례로 얼마 전 보았던 살인마에게 복수하는 호러 영화의 주인공도 이것을 보여줬고, 액션 자체가 주류가 되는 드래곤볼이나 세인트 세이야같은 소년만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SF영화의 걸작인 블레이드러너에서도 데커드에게 동료를 잃은 레플리컨트가 그에게 복수하며 비슷한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죠.


이 클리셰는 보통 과거의 원한이나, 핍박받던 동료들의 복수를 트리거로 등장합니다. 부당한 상황을 타개해내는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을 계속해서 억압하는 악당에게 공격하는 것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죠.


단순히 주인공의 반격이라는 선을 넘어, 주인공이 가하는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권선징악이라는 틀 아래 악당이 공격받는 분명한 이유를 드러나게 하여 이야기적인 당위를 형성합니다. 이야기의 발단부의 일을 절정부와 연결시켜 그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이죠.


이 클리셰는 대개 분노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표출됩니다. 적을 공격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황에 대해 위 대사를 통해 방향성과 성격을 부여하여 이야기의 드라마를 부여하는 것이죠. 이야기 외적인 측면에서도 단조로워질 수 있는 장면에 개성을 부여하여 색다른 인상을 받도록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내퍼의 몫! 이라며 패러디한 만화를 어디서 봤었는데...


사실 이 클리셰는 지금에 와선 너무 보편적이 되어서 보다 트렌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어느 정도 피하는 연출이 되었습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나 고스트 스위퍼의 루나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뒤섞어 웃음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아예 정말 중요하지도 않은 것만 나열하며 등장인물의 성격을 부각하는 방식의 연출 등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소년만화 등의 장르에선 여전히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느와르 장르처럼 원한관계와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경우엔 여전히 애용받는 클리셰입니다만, 이제는 대사로 일일히 설명해주는 것조차 다소 유치하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설사 등장인물이 저렇게 생각을 하더라도 입으로는 내뱉지 않게 바뀌고 있습니다. 차라리 회상씬을 넣거나, 과거의 동료를 상징하는 다른 물건 혹은 무기를 사용하거나 하는 식으로 소화를 하면 했지.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만화이야기2017.09.14 10:12


 제가


자주 인용하는 유희열의 코멘트가 있습니다.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친한 뮤지션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본인이 만들었던 곡 가운데 가장 아끼는 곡과, 가장 아쉬운 곡,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운 곡을 꼽아야 했던 때였는데- 전자들에 대해선 순순히 답하던 그가 본인에게 별로인 곡을 뽑아야 했을 때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아꼈습니다. 그 자신이 작곡자이자 작사가이기에 저런 태도는 상당히 의문스러웠는데 이후 이어지는 그의 말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해 주었습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곡을 좋아하는 팬들이 있기 때문에 공공연히 그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정확히 저 표현은 아니었지만, 저런 뉘앙스의 표현이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찌보자면 황희 정승의 검은 소, 누런 소 이야기와 같은 논지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뭐... 지금에 와서는 검은소 누런소 중에 누가 더 일을 잘하냐, 사실 황희가 제일 잘한다라는 농담이 돌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 자신도 엇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언젠가 MBC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박진영이 나와 2PM와 빅뱅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을 계기로, 2PM와 빅뱅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빅뱅이 메가히트를 연달아 한 이후 휴식기를 가지던 시기였고, 그 사이 2PM이 예능과 노래 양자에서 큰 성과를 거두며 새로운 아이돌의 정형을 제시했던 때였습니다. 지금이야 두 팀 다 장기공백이 예상되고, 이런저런 사건을 겪은데다, 부침 이후 어떻게 극복하고 다시 정상에 올랐나 등등의 여러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때보다 훨씬 쉽게 우열을 논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만해도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뜨거운 감자라면 뜨거운 감자였죠.


하지만 저는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너무나 손쉽게 순서를 정했습니다. 두 팀이 나란히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격차가 있다 생각했고, 분명한 근거도 있었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여러 상황을 보면 저의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요.


그런 이내 저는 크게 당혹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언급하지 않은 쪽의 팬이 굉장히 상처를 입었다는 게 내심 드러나더라고요. 언뜻 왜 이런 것에 상처를 받나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것이 상대에게는 굉장히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수습하기 위해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입니다.


요는 이겁니다. 대중작품은 필연적으로 '대중에 공개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자연스레 다양한 성향의 개개인에게 각각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에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갈리게 되는데, 때로 작품에 대한 박한 평가가 그것을 즐겁게 즐긴 자신에 대한 평가로 여겨지는 상황이 닥치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 평론가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놓고 평한 것에 대해 관객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길게 흘러 따지고 보면 평론가의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닌 경우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죠.


그리 전문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만 여러 콘텐츠에 대한 리뷰 등을 써오다보니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작품이 하나 나왔을 때 존재하는 무수한 평가와 그 평가만큼이나 무수한 팬들의 취향을 하나하나 다 고려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모난 부분은 모두 쳐낸채 그저 분량만 채우는 글이 될 위험성이 아주 커진다는 것을요. 팬들을 다 고려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팬의 입장에선 굉장히 중요하지만, 사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그만큼의 무게를 갖지 못하는 게 커플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누굴 택해도 다른 커플링을 지지하는 팬들에겐 안좋은 소리를 듣는거죠. 뭐. 조악한 비유였습니다.


이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마찬가지로 모든 팬들을 다 고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는 대중성을 지향하는 오락작품을 즐겨 예를 들곤 합니다. 개인적인 믿음이긴 합니다만 결국 흐름은 상업성과 오락성이 작품성과 결합했을 때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이죠. 저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다른 작품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개성이라고 판단하는데- 그 개성은 다름 아닌 고립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이 고립에서 나온 특색이 모든 팬들에게 긍정적으로 평해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중작품으로서의 대중성과 창작자로서의 개성이 병존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창작자들이 씨름을 벌이고 있는 논제이며, 때론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실패해버린 작품들도 적잖게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이 작품에 온전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창작자에게 있어 작품이란 수용자가 무리없이 받아들이는 이야기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과 세상에 대한 시선을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창작자는 작품을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반면, 수용자는 작품의 일부에 자신을 대입하여 파악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괴리가 발생하게 되죠. 흔히 이야기적으로는 매끄럽지만, 일부 캐릭터에 생동감이 없다는 비판이 바로 여기에서 불거집니다. 애초 특정한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에 캐릭터성을 부여하게 된다면 이야기적으로 산만하게 되거든요. 이야기적인 구조로 작품을 파악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못할 비판일 겁니다. 특정한 캐릭터의 팬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달리 하라 요청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하튼 팬들을 다 고려하는 건 쉬운 일도 아니고, 사실 딱히 옳은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작품의 해석과 정의의 최전선에 서는 창작자의 독특한 지위를 고려해도 말이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공포영화는


연출과 소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장르이고, 저작권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디어라는 특성과 함께 창작자 개인의 개성이 오롯이 반영되는 연출이 조합되곤 합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독특한 개성을 확립한 장르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무수한 아류작으로 이어지며 장르를 형성하는 수준까지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 집니다.


금일 다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날뛰는 사악한 존재들이라는 클리셰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공포영화는 이러한 틈에 위치하여 그것을 자극하기 위한 여러 소재와 연출을 이끌어 냈습니다. 처음에는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 어느 순간엔 존재 본연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로까지 번져갔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날뛰는 사악한 존재는 이러한 클리셰 전반에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포가 가진 보편적인 특성, 꺼리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금기에 대한 호기심에 더불어 자극을 쫓는 인간의 성질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인간이라는 소재를 메타적으로 다루어내는데서 발생하는 독특한 질감도 무시할 수 없고요.


캐빈 인 더 우즈의 한 장면. 공포는 결국 감정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 존재의 당위성과 설득력에 상처를 입으면 창작자는 전혀 의도한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공포영화가 당사자로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공포영화에 전혀 그 재미와 긴장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을 저 장면은 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자연스레,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면 날뛰는 사악한 존재들이라는 클리셰가 생겨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하지요.


지금 세 편의 영화를 예로 들어 보려 합니다.


첫번째는 바로 프레디 크루거가 등장한 13일의 금요일입니다. 엘름 거리에 악몽으로 전해지는 전설적인 살인마 프레디 크루거는 꿈속에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도 자신의 정체를 흘리는 면모를 보입니다. 이는 잔혹하면서도 지능화된 현대의 연쇄살인마의 일면을 떠올리게 하며,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 대한 공포를 환상적인 소재를 섞어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풀어낸 결과입니다.


두번째는 바로 흑인 살인마가 등장하는 영화로 유명한 캔디맨입니다. 괴담을 쫓는 과정에서 그 괴담에 사로잡히고 이윽고 또 하나의 괴담의 주인공으로 재탄생된다는 이야기의 캔디맨은 13일의 금요일의 연쇄살인마와 그로 인한 악몽을 넘어, 그 기원과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결코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는 괴담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괴담이 왜 괴담으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괴담은 새로운 살을 덧대어 가는지, 그리고 왜 인간은 괴담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괴담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포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꼽는 영화는 바바둑입니다. 바바둑은 이제 외부에 대한 인간의 미지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을 넘어,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다루어 냅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든 싱글맘에게 언뜻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거세하거나 배제해서는 안되는, 이제는 조심스레 공존해야 하는 자신의 일면임을 인정하라 이야기합니다. 인정하기 힘든, 그러나 인정해야만하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두려움을 공포 그 자체로 구현해낸 것이죠.


이들은 각자의 영화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미쳐 날뜁니다. 사유는 이렇습니다. 첫번째는 괴담으로서의 생명력을 존속시키기 위함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언행을 하는 이가 당했을 때 드라마적인 효과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관객을 보다 몰입시키기 위해 이것이 단순한 영화 내의 장치가 아닌 당신이 더욱 영화를 재밌게 즐기기 위한 몰입의 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죠. 마지막은 역시 이것이 보다 공포스럽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정한 것이 바로 자신을 덮쳐오는 것에 대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스릴러건


호러 장르이건,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감춘 살인마 캐릭터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캐릭터들은 손쉽게 감출 수 있는 작은 흉기를 무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종종 당혹스러울 정도로 편의적이라 느끼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컨데 날 길이가 20cm 정도도 안 되는 잭 나이프를 든 살인마로부터 연인을 지키기 위해 야구배트를 휘두르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 저항감없이 떠오르죠? 그만큼 이 장면이 익숙하다는 겁니다. 오늘 다룰 클리셰는 이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방망이를 든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칼을 든 사람에게 맞서는데, 칼을 든 살인마에게 너무나 허망하게 제압되어 버립니다. 세세히 따지고 보면 단순히 제압되는 것을 넘어, 엄연히 평범을 가장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살인마에게 기세부터 힘까지 모든 면에서 밀립니다.


사실 잭나이프가 위협적인 흉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구방망이 같은 것도 무시무시한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은 매 한 가지거든요. 무엇보다 칼에 비해 길이도 길고, 다루기도 쉽다는 엄청난 장점이 존재하는데도요. 칼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훈련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칼에 다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결사의 정신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남자를 작은 칼을 든 연쇄살인마가 쉽게 제압하는 것은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는 장면은 아닙니다.


이것은 살인마를 절대적인 위협으로 놓고, 이야기의 위기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현실에선 총을 맞고도 맨손으로 무장강도를 쫓아보내는 사례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케이스도 아니고, 호러나 스릴러에 그렇게까지 어울리는 장면도 아니거든요. 결과적으로 여러 작품에서 자그마한 칼을 든 것만으로 덩치도 크고, 무기 길이도 훨씬 긴 희생자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제압하는 천하무적의 살인마들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스크림이 당대 잘 만든 영화로 평가받았던 데엔 저런 작은 칼을 든 살인마가 건장한 육체를 가진 이들이 무력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충실하게 잘 만들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과거의 무한탄창처럼 그저 철저히 재미와 흥미를 위해 마련된 작위적인 설정인 걸까요? 따지고보자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 현직 경찰 및 경찰대학 출신의 김복준이, 흉기를 든 상대에게 공격받은 이후 칼날을 보면 몸이 굳는다며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밝혔던 바 있습니다. 육체를 단련하고, 여러 극한 상황을 경험한 경찰도 이러할진대 칼을 든 상대와 대치할 것이라 상상조차 않은 일반인들이 굳어버리는 것은, 그리고 이로 인해 더욱 손쉽게 제압당해 버리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상기에서 총을 든 상대를 맨손으로 쫓아보낸 케이스가 있는가하면, 일가족이 부엌칼 하나에 벌벌 떨며 강도를 당한 사건도 존재하거든요. 검도삼배단이니 하는 것이 단순히 무기의 길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칼에 대해 가지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이 있긴 하다는 거거든요.


또한 계급이 깡패니 하는 말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칼을 든, 그리고 자기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사람은,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이겨내는 것을 너무나 손쉽게 해냅니다. 자신이 살인마라고 생각하는 쪽과, 자신이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쪽이 맞부딪힌다면 당연히 전자가 손쉽게 이겨낼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이미 몇 번이나 극한 상황을 경험하며 막다른 길에 몰려 온 몸에 아드레날린을 뿜으며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이들조차 너무나 손쉽게 제압하는 살인마들의 모습이 매번 설득력 있다고 말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1999년


방영된 mbc 드라마 왕초는 당대 특정 인물에 대한 미화와 특정인물에 대한 비하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바 있습니다. 작품이 방영되기에 앞서 픽션이다라는 메시지가 나왔지만, 어디 특정 인물을 전면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그러한 논란에서 자유롭기가 쉽나요.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왕초는 사실 꽤나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얼마 전(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2년 전이군요) 방영되었던 리멤버 왕초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비록 정규편성에는 실패했지만, 한대 열광했고, 추억이 되었고, 인상에 확실하게 남은 추억의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실제로 저도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고, 최근 mbc 유투브 채널에 올라온 전편을 천천히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왜 그렇게 재밌었을까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거지라는 신선한 소재에 더해 일제강점기, 해방기, 6.25전란, 전후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사내의 뜨거운 이야기라는 점을 들 겁니다. 결코 이어지지 않을 듯 하면서도 결국은 이어지는 운명적인 사랑도 빼놓을 수 없고요. 작중에는 언급되지만 역사의 한페이지를 수놓은 인물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기도 하고,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단연 매력있는 악역을 들 수 있습니다.


차인표가 본 작에서 꽤 괜찮은 연기를 보입니다. 허준호와의 캐미가 상당히 괜찮죠.


본작에서 악역이라 부를 만한 인물은 대충 대여섯 정도 됩니다.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 일본 순사에서 비리경찰까지 거치는 아베, 고문기술자인 센세이, 춘삼의 오랜 친구이면서도 마지막까지 친구의 이름으로 배신했던 형도, 그리고 춘삼의 라이벌격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발가락이 그러하죠.


이들 가운데 몇몇은 최후에 개심하고 반성하지만, 또 몇몇은 끝까지 악역의 포지션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발가락은 후자에 가깝지만, 단순하게 그렇게 잘라버리기엔 그가 본 작의 주인공인 김춘삼과 맺는 관계가 너무도 독특합니다.


그는 춘삼을 싫어한다 공공연히 밝히고, 실제로 몇번이고 마찰을 일으킵니다. 춘삼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염천교 식구들을 괴롭히기도 하죠. 어린 시절 왕초 자리를 두고 겨루는 과정에서 그에게 자신의 한쪽 눈을 잃어 그에 대해 원한을 품고, 춘삼은 물론 그의 가족들까지 가만히 두지 않겠다 이야기하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그는 변화한 시대상을 맞을 때마다 춘삼에게 몇 번이나 일종의 화해요청을 '먼저' 하곤 했습니다. 그 화해의 이면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심리와 함께 서로가 부딪히면 힘들 거라는 일종의 위협이 엿보입니다만, 동시에 한 때 같은 움막에서 먹고 살았던 사이지 않냐는 일종의 동료의식이 일정부분 베어 있습니다. 춘삼이 당대에도 올드하지 않냐는 평가를 받던 이해심 넘치는 선역의 포지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화해 요청을 먼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굉장히 독특한 일입니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행동의 변화의 주체성을 넘기고 화해를 요청하는 악당이라니. 물론 춘삼은 이러한 발가락의 요청을 너무나 간단히 거절해버리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주인공과 악당의 그것만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지독한 악역의 포지션처럼 보이는 발가락이지만 그는 춘삼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동시에 춘삼도 발가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춘삼은 거지패의 왕초로, 발가락은 이정재의 최측근으로서 살아가기에 이전과 같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일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동시에 최소한 서로가 처한 입장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춘삼이 가장 오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서로에 대한 일종의 동질감마저 표현하는 순간이 오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발가락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 홀로 세상에 맞서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내는 춘삼을 달리보고 있습니다. 춘삼은 발가락을 상종도 못할 인간처럼 이야기하지만 위급할 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죠. 결국은 그가 자신과 함께 대구의 움막촌에서 출발을 같이하는 인물이니까요.


발가락의 포지션은 여타의 작품에서라면 최후의 최후까지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반대로 너무나 간단하게 잡졸로 전락하곤 합니다. 성장한 시점에서 발가락이 처음 등장할 때 가장 무서운 악역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장 위협적인 악역도, 가장 짜증나는 악역도, 가장 미운 악역도, 그렇다고 웃긴 악역도 아닌 상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까지 나아가죠.


쉽게 말하자면  그는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입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루기도 까다롭고, 활용하기도 곤란할 정도로요. 위협을 줘야 하는 악역은 익숙해져선 곤란함에도 그는 이 애매한 포지션을 끝까지 유지하여 작품에 색다른 재미를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종래엔 결국 그도 시대의 한 사람이구나라고 여겨지며 춘삼과 겹쳐지는 일면을 보이죠.


이는 결국 김두한, 이정재라는 실존 역사 인물의 행적을 작중에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보인 행보에 너무 커다란 창작자의 주관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제한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김춘삼과 발가락은 본작에서 사실상 창작 캐릭터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실존 역사 인물을 제치고 여기저기서 맹활약하고 역사의 흐름을 건드려버리면 이야기의 흥미도 떨어지고 실존감도 낮아지는 문제를 낳을거라고 본 거죠. (...이때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이실존인물의 주변에 위치한 창작캐릭터라는 독특한 포지션이 결국 독특한 캐릭터성으로 이어진 겁니다.


아마 제작자들에게 이러한 캐릭터를 다시 만들어보라면 다시 만들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배우 허준호의 호연도 호연이지만, 차인표가 맡은 김춘삼과의 관계에서 불거지는 독특한 분위기, 뭐 하나 딱 짚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는 시대상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며 생겨난 균형미에서 불거진 캐릭터이니까요.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사회가


복잡하고 다변화되면서, 이제 더 이상 나이는 현명함의 상징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의 현명함이란 마치 인상비평과 같이 한 눈에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타개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대안을 내세울 수 있을지 정도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명함은 당연하게도 전문성을 요하는 특정한 분야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사에 대한 관점, 보다 넓게는 사회의 질서에 대한 태도,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다하기 위한 노력, 인간이 아닌 것에게까지 미치는 정서에 기한 접근방식에까지 서로 괴리된 면모를 보이는 상황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세계대전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다시피하였고, 일정 수준 이상의 풍요를 향유하게 되면서 물질적인 가치관에 대한 추구 역시 이전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또 문화적 황금기를 거치며 다양성이 보장되고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으로 세상을 파악하게 된 영향이 큽니다. 세번째로는 발달한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레 사회적으로 이전에 존재치 않았던 고도의 도덕성과 규칙을 요구하는 수순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상의 변화에 꾸준히 발맞추지 않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리석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현명하다는 것에 대한 전제는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이것은 클리셰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과거 현명한 마을 장로라는 정형을 갖추었던 클리셰는, 어느 순간 그 역할은 유지한 채 주체를 완전히 달리 하게 됩니다. 되려 어린 아이가 현명하게 조언하고 본질을 깨우쳐주게 되었죠. 금일 다룰 어른보다 더 현명한 똑순이 캐릭터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사건 대한 조언부터 연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왜 이런 클리셰가 사용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참고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비단 소녀 캐릭터만이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클로이 모레츠나 다코타 패닝, 김민정, 박시은 등처럼 소년 캐릭터에 비해 이러한 깍쟁이+똑순이가 결합된 소녀 캐릭터는 수십년째 널리 사랑받고 있고, 소년 캐릭터에 비해 보다 분명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른보다 더 현명한 꼬마 캐릭터라는 표현은 이후 다룰 클리셰- 누구보다 먼저 상황을 파악하는 어린아이와 겹치는 면이 강하거든요.


500일의 썸머의 클로이 모레츠. 이러한 똑순이 캐릭터는 어른의 행동을 보이는 반면, 때론 지극히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이며 독특한 매력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해낸 아역들은 이후 성인 연기자로도 훌륭하게 잘 적응해 내기도 합니다.


고민을 가진 청년이 집으로 돌아오자 나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그의 고민을 듣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청년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여동생은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며 그가 다다를 결과까지 파악하고 "그래. 너 하고싶은 대로 해라."라며 달관하거나 "그런 식으로 했다간 반드시 실패한다"라며 닦달하는 태도까지 보입니다. 다소 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닐 겁니다.


이러한 장면이, 그리고 이러한 캐릭터가 클리셰가 여러 문화권에서 널리 이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효과는 어떤 것일까요.


세 가지 효과를 가집니다.


첫째. 어른을 초라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아이 앰 샘의 다코타 패닝은 순수를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억압하는 어른들의 면모를 꼬집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아이도 아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어른이라는 캐릭터는 여러 면엔서 우리의 가슴을 울립니다. 우리는 교과서에 배운 대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 스스로를 위안하며 이상과 원칙을 외면하죠. 이것이 잘못되고 결국 큰 문제를 낳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회피합니다. 결국 아이들의 세상풍파에 찌들지 않은 조언은 우리가 원칙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합과 동시에 정답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둘째. 상황의 본질은 결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어른의 닳고 닳은 관점이 되려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을 낳을 때 아이가 이것을 명백하게 타파해 줍니다. 도중의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며 행동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조언하는 똑순이 캐릭터는 당장 행동하기를, 그리고 때론 복잡한 계산보단 마음이 담긴 행동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연애의 박시은. 이러한 계열의 소녀 캐릭터들을 보노라면 쟤들이 나보다 연애를 잘 해도 몇 배는 잘 하겠구나 싶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캐릭터들은 작중 나름대로 잘 풀리는 연애생활을 하곤 하죠.


마지막. 귀엽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할 법한 조언을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어린 소녀들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하면, 그 자체로 참 절로 미소가 지어지거든요. 이 경우는 조언하는 아이가 정말로 특별할 정도로 똑 부러진 면모를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는 똑순이 캐릭터 상당수가 여기에 속할 겁니다. 당장 예시로 든 500일의 썸머에 클로이 모레츠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죠. 물론 이 하위 케이스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을 강조하는 장치로, 여동생이 되려 자신보다 여자친구를 더 잘 이해하더라라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만화이야기2017.07.15 20:27


 얼마 전


비슷한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웹툰 아일랜드를 보던 중 한 캐릭터가 나오는 순간 바로 스크로를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아일랜드를 보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보던 중이었습니다. 여름을 노린 호러 영화였는데, 그 소재를 확인하곤 바로 채널을 돌려 버렸습니다.


 다음 달 개봉하는 영화 장산범. 숨바꼭질 역시 그 해에 논란이 되었던 현관문 낙서 괴담을 영화화한 것이었죠.


이미 제목에서도 작성했지만- 예. 장산범 이야기입니다.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장산범이라는 소재가 '지금 시점에' 메인 스트림에서 회자되는 것이 당혹스럽고, 황당하기까지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 말이죠.


언젠가 아일랜드의 슈퍼 스트링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헤이든 크리스텐슨을 옛 트릴로지의 아나킨 스카이워커 이미지에 덧씌워 버려 기존 팬들이 반발하고 들고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심경이라고 밝혔던 바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좋았던 작품에 사족을 덧붙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요. (...이 블로그가 아니라 딴 데서 했나...?)


아일랜드에서 장산범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의 감상의 배가 넘는 정도의 당혹감과 회의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차라리 창작 요괴였다면, 차라리 너무 흔해 빠져 더 이상 이용되지 않는 요괴였다면, 차라리 기존의 인식과 완전히 달라 반발을 불러낼 정도의 요괴였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의 범주 내의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같은 의미에서 올해 개봉되는 영화 장산범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늘의 글은 만화 아일랜드나 영화 장산범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장산범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 다루는 글이며, 아무리 진부한 소재여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하듯, 장산범을 다루었다고 해서 결코 좋지 못한 콘텐츠가 될 거라는 이야기 역시 결코 아닙니다. ...애초에 장산범은 현 시점에선 개봉도 안했죠.


여하튼 그렇다 하더라도 소재 하나에 이렇게 회의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언뜻 이상해보입니다. 제가 어째서 이런 스탠스를 취하게 된 걸까요.


십수년만에 복귀한 멀더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초자연현상 신봉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음모론과 초자연현상의 전도사같았던 엑스파일이 근 20여년을 논리적으로 논박당하고, 그러한 엑스파일을 반박하는 콘텐츠가 주류가 되고 또 그것을 일신되는 등 환경 자체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대 좋은 콘텐츠로 평가되었더라도 결국 시대적인 상황에 보다 와닿는 소재는 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첫째. 장산범은 괴담으로서의 효력을 이미 상실한 콘텐츠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유행이 지났다는 겁니다. 이 유행은 복합적인 표현입니다. 먼저 인터넷 유행이 지났다는 것에 대해 언급해야겠네요. 장산범은 대표적으로 '만들어진 괴담'에 해당합니다. 어딘가에서 들어본법한 소재들이 불특정 다수의 재미를 위해 뭉쳐져 만들어진 인터넷 시대의 유행이죠. 이것 자체를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인터넷의 유행은 정말로 빠르게 흘러가고,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겐 너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기에 어느 대상층에게도 무게감을 갖지 못합니다. 실시간으로 장산범 콘텐츠를 즐겼던 이들에겐 "저걸 왜 지금하고 있어"라는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고, 애초에 전통적인 괴담에 익숙한 세대들에겐 "하다하다 저런 것도 나오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인터넷에 워낙 화제가 되어 공중파에서도 한 두 차례 다루려 했지만, 실제 전문가들이 잘라서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고, 그런 괴담이 있을 리도 없다."라며 말해 이야기적인 생명력이 아예 끝나버리기도 했고요.


보다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바로 장산범이 속해있는 크리쳐류의 괴담의 수명 자체가, 사실상 20세기 말미 그 수명의 끝을 고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21세기 들어서도 여러 괴생명체에 대한 콘텐츠는 여전히 생산되고 있습니다. 접근법과 작품 내 소화방식을 보다 현대화하여 풀어내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전과 같은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네스 호의 네시나 백두산 천지의 괴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과학을 통해 세상의 기원을 바라보며, 심연 너머로 향하는 현대인에게 있어 이러한 괴물은 그다지 피부에 체감되는 괴담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한반도 최강의 맹수가 멧돼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크리쳐물 특유의 소재의 허황됨을 반박하는 자료와 창작물까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몇몇 미세한 변주가 가해진 정도로는 장산범이라는 소재를 특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장산범은 이미 이미지 소비가 너무 많이 되었다는 겁니다. 인터넷 괴담-그 괴담을 빌린 웹툰 등의 콘텐츠-그것을 비틀어 희화한 또 다른 콘텐츠 등등등....

<ⓒ 조석, 마음의 소리, 2006> 767 전설의 고향 2013 중에서


둘째. 민담으로서의 가치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즉, 새삼스레 변주될 만한 소재의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장산범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꾀어 잡아먹는, 이른 바 '호환' 내지 '구미호가 홀린다' 류의 괴담의 아류에 해당하는 괴담입니다. 문제는 그 원전 격인 호랑이와 구미호의 이야기적 생명력 자체가 이미 현대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호랑이는 멸종상태이고, 구미호는 커녕 일반 여우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니 괴담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공백을 가상의 괴물인 장산범이 채울 거란 기대는 너무 시대착오적이죠. 현재 한반도 최상위 맹수가 멧돼지로 불리는 상황이니까요.


괴담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세계와 가치관이 반영되어 힘을 가집니다. 옛 유럽에서 목없는 기사에 대한 괴담은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이었다면, 현대 사회에서 목없는 폭주족은 난폭운전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엇비슷해보여도 지향하는 가치나 교훈에 차이가 있고, 지향하는 가치나 교훈이 동일하더라도 나타나는 표상이 달라지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장산범은 지금 시점에서, 딱히 그만의 차별적인 민담으로서의 가치도 교훈도, 의미도 없는 소재입니다. 차라리 한반도에 멸종되지 않았을 호랑이를 찾는 게 더 나을 정도로요. 이미 시대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공존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에게 교훈을 전달하는 소재는 핵과, 인간의 무지함과, 오만함과, 안일함 등입니다. 자연-그것도 특정한 숲이나 계곡으로 한정되는-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장산범이라는 소재가 그나마 효력을 가지려면 현대사회가 배경이 아니라, 조선시대가 배경인 것이 좋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바엔 구미호나 호랑이의 괴담을 더 탄탄하게 구성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이야기인 것은 매 한가지이니까요. 원전이 가진 무게감을 따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상황이니 장산범을 다룬 콘텐츠는 어지간히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갖추지 않는 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아 가능하다는 것은 소재에 국한되는 작품이 아니라는 소리기 때문에, 반대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행도 지났고 이야기적인 의미도 없는 장산범을 굳이 끌어올 필요가 없는 거죠.


세번째는 단순합니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사용한 유행어가 결국 시간이 흘러 보았을 때 작품 내적으로 별다른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넘어, 되려 한 때의 유행이었기에 몰이브이 대상에서 꺼려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드래곤볼의 물로 보지마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 시류를 대표하지만 정작 작품과는 합치되지 않는 방식의 유행의 도입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데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언젠가 언급하기도 했었습니다만, 창작 위키 계열의 하나인 SCP재단의 경우, 기존의 괴담을 수집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괴담을 창작하기도 합니다. 예. 인터넷 괴담 장산범과 완전히 같은 관점에서 만들어진 콘텐츠입니다.


길게 이야기했습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인터넷 시대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괴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 자신도 적잖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폭이 넓어진다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죠.


다만 만들어진 괴담에 대한 재해석 없이 단순하게 차용한 흔적이 너무나 역력하기에 맥이 탁 풀려 버리는 겁니다. 최소한 오래된 괴담은 그 시대에 걸맞는 배경이나 소재,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최소한의 당위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산범은 그렇지 못해 참으로 얄팍하잖아요. 결국 유행에 의해 유명해졌다 그 정도 수준인데- 과연 이것만으로 의도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요.


결국 오늘 이야기가 기우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단순히 소재에 국한되는 작품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넓혀 이미 흘러간 옛 유행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기를 말이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당연히


검은색 옷을 입지 않은 악당들은 셀 수도 없습니다. 되려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치장한 매력적인 악역이 검은색 옷을 입지 않은 악당들에 비해 주류인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러한 측면에서 오늘 다룰 클리셰를 보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목의 검은색 옷을 입었지만 악당이 아니다는, 작중 '검은 색 옷을 입고, 악역처럼 보이거나 혹은 악당처럼 등장했지만, 사실은 악당이 아니었다'로 전개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서술트릭이라 할 수 있죠.


오늘 다룰 클리셰는 악당은 검은색 옷을 입는다라는 클리셰와 악당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라는 클리셰 둘을 뒤섞은 결과물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더해 주인공의 라이벌은 어두운 빛깔의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다도 간혹 결부되기도 합니다.


해당 클리셰를 가장 극적으로 활용하는 장르 중에 하나는 거대로봇물일 겁니다. 거대로봇물만큼 배색을 중요시하는 장르가 많지 않으니까요. 형형색색의 화려한 도색을 보여주면서도, 희소성을 가진 검은색이 가진 특유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십분활용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등장한 검은색 일변도의 로봇, 그러나 알고 봤더니 정의로운 심성까지 복제된 마음의 형제였습니다. 실제로 마이트 가인 시리즈에서 블랙 가인은 오리지널 이상의 인기를 가진 캐릭터로 유명하죠.


실제로 만들어진 지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험악하게 생긴걸로는 어디 내놔도 안빠지는 마징가Z, 작중 등장인물로부터 악당 로봇 아니냐며 계속 되물어지는 외모의 가오가이거, 외전 게임이기는 하지만 검은색이라 악당인 줄 알고 되살렸더니 자신을 정의의 편이라고 밝히는 마이트가인의 블랙 가인, 악당조차 그 포악함에 혀를 내둘렀던 블랙 겟타 등등등이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다른 장르에서도 이러한 트릭을 얼마든지 활용하기도 합니다. 슈퍼히어로 장르처럼 배색 이미지에 마찬가지로 크게 영향을 받는 경우-예컨데 배트맨-도 그렇습니다만, 검은색 자체가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널리 이용되고 나름의 분명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 세련된 색인지라 장르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 예컨데 검용전설 야이바의 쥬베에라거나 베르세르크의 가츠라거나.


적처럼 등장한 검은색의 캐릭터는 계속해서 아군인 경우도 있습니다만, 여러 상황 전개로 인해 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전자면 좋고, 후자면 더욱 좋죠. 전자면 이야기를 구성하기 편하면서도 검은색을 추가하는 것을 통해 다양성을 더할 수 있고, 적이 되면 캐릭터에 입체성이 더해져 이야기가 매력적이 되거든요.


해당 클리셰가 사랑받는 것은 이러한 취향과 이미지를 붙잡으면서도 한 번의 변주를 가해 색다른 인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독자에겐 신선한 이미지를 불러 넣으면서도, 이야기엔 나름의 변주를 더하고, 캐릭터 디자인상 검은색 특유의 편의성과 미적인 측면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거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