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는


새를 쫓기 위해 사람 모양을 흉내내어 만든 후 밭에 세워두는 인형입니다. 그 목적부터가 대상을 모방함을 통해 상대를 놀라게 하고, 진입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나요. 본연의 모습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면 닮은 그 모습 때문인가요. 우리가 허수아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론은 달라질 겁니다. 이토 준지의 허수아비는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이 허수아비라는 것은 대충 인간을 흉내내 만드는 것 정도에 그치기에, 그것을 만들기 위해 굳이 따로 재료를 사는 수고를 들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입다 허름해진 옷이나 산발이 되어 버린 가발같은 걸 뒤집어 씌워 적당히 만드는 것이죠. 인간과 적당히 닮았기에, 원활하게 여러 이미지가 편의적으로 뒤집어 씌워지고,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비단 동양에서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허수아비를 대상으로 한 이런 저런 괴담이 존재하고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궁금해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본질일까요, 피상적인 모방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모방코자 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상대방에 대한 거절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인식?






허수아비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연달아 사람들이 죽어나가 장례식이 끊이지 않는 마을. 외동딸 유키를 잃은 누마다는 장례식이 끝난 이후에도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매일같이 딸이 묻힌 무덤을 향해 갑니다. 그곳에서 만난 딸의 전연인에게 죽음의 책임을 물으며 홧김에 밭에서 허수아비를 뽑아 무덤가에 꽂아버렸는데, 어느날부터 허수아비는 서서히 딸의 모습을 닮아 가기 시작합니다. 오직 무덤가에서만 생전의 무덤주인의 모습을 닮아가는 허수아비는, 사자를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로 인해 그 숫자가 서서히 늘어납니다. 그 가운데엔 무표정한 다른 허수아비와 달리 한과 원망에 가득찬 허수아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전에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유키의 전 남자친구 시게루는 꿈에서 자신을 찾는 유키의 꿈을 꾸고, 잠에서 일어나면 무덤가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案山子 かかし, Scarecrow


이 에피소드는 허수아비를 매개로, 사자의 한과 원망을 푼다는 구성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의도치 않게 찾아온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살아생전의 일들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거나 아끼던, 반대로 내가 원망하거나 혐오했던 것들은 내가 죽고 나서도 여전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러한 발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고 나서도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고, 죽음을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 부르며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려 노력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겪은 이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일종의 위안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죽음과 탄생의 이미지는 병존하기 시작했고, 인식은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허수아비를 시체나 죽음에 비유하는 경우도 드물잖습니다. 그 특유의 뻣뻣한 모습 때문일까요.


더 이상 죽음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분리시키는 계기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역시 삶에 포함되는 개념이 되었기에, 되려 살아있는 사람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허수아비는 그래서 죽음과 닮아 있습니다. 본질이 아닌 허상일 뿐이지만, 무엇을 투영시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그 연결도 살아있는 사람이 가지는 감정에서 비롯되기에 되려 살아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됩니다. 작중 연인에 대한 그리움, 자신을 해친 자에 대한 원망과 증오라는 감정이 허수아비로부터 비롯된 듯 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경험한 일들은 허수아비를 매개로 그들 스스로가 일으킨 환상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스스로 여겼기 때문에 말이죠.






불쾌한 골짜기라 불리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과 적당히 닮았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면 거부감과 혐오감이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학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제는 서브컬쳐 전반에 널리 쓰이는 이야기가 되었죠.


실제로 적당한 데포르메는 자신이 가진 인식을 투영하여 대상을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일치도가 서서히 높아지면서 어느 순간 어중간하게 인간을 닮은 대상에 대해 이러한 투영이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동시에 닮은만큼 커진 이질감에 일종의 배척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인가를 쫓는다는 허수아비의 목적과도 합치되며 더욱 더 큰 시너지를 불러 일으킵니다.


허수아비는 인간과 닮은 것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간을 닮은 모습이라는 건 대상을 쫓는다는 것에 대한 부수적인 목적에 해당하죠. 자연스레 허수아비도 이러한 불쾌한 골짜기에 해당합니다. 그에 따라 허수아비는 오랜 시간 호러 클리셰로 자리잡아 왔죠.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말입니다.


예컨데 서양에서 인간과 정말 닮은 허수아비가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알고보니 사람 시체더라라는 괴담이 있고, 동양에선 요괴가 사람을 홀려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는 식의 괴담이 있습니다. 인간과 어슬프게 닮았다는 점에서 거부감과 일종의 공포를 자아내고, 그에 수반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죠.


실제로 간간히 사람과 너무 닮아 화제나 논란이 되는 허수아비도 있곤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 놀라서 당국에서 교체하라 요구하라는 뉴스가 몇 년 전 있기도 했죠.


이것은 허수아비가 만들어진 모습이, 과거 인간이 받았던 형벌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사지를 포박당하고,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형벌을 받는 모습이 널리 보여야 했기에 일종의 십자가 형이 존재했고, 이러한 십자가에 다른 생명체를 매달아 일종의 장식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매달린 허수아비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이러한 학습의 효과도 있었던 겁니다.


또 다른 클리셰로는 복수하는 귀신, 연인에 대한 집착으로 끌고가는 귀신 등이 있습니다. 사자의 강한 원념이 결국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으로, 너무 유서깊고 널리 사용되어서 이젠 되려 낡아보이는 클리셰이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처녀귀신이 조합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작중에서 허수아비는 생전의 한을 풀기 위해 되돌아왔다는 인상입니다.


생전에 자신을 살해했던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맺어지지 못했던 사람과 죽음을 통해 맺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흔히 죽음이 갈라놓는다 표현하지만, 죽음은 계기일 뿐 결코 상황에 대한 정의는 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대상이 죽었을 때 그 모든 결말이 헤어짐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은 결국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닮아 있으며, 이 괴담이 단순히 사자의 귀환만이 아니라 생자의 죄책감이라는 방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줍니다.






이야기적으로는 참으로 무던한 에피소드입니다. 허수아비에 대한 여러 상징성이나, 초현실적 사건이 귀신 때문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의 죄책감이나 미련 때문이지 따질법한 요소는 있지만, 뭘로 봐도 사실 그렇게까지 특별한 에피소드는 아니니까요. 구성자체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온 뿌린대로 거둔다에 해당합니다.


지퍼스 크리퍼스, 쏘우, 슈퍼내추럴 등등등 허수아비에 초자연적 이미지를 덧씌운 작품은 수도 없이 많고, 그 가운데엔 신으로서 모시는 경우나 아니면 악마를 봉인한 뉘앙스의 작품도 있습니다.


저 개인에겐 분량채우기(물론 단편 모음집이니까 전혀 적합한 표현도 아니고, 사실관계에 맞는 일도 아닙니다.) 내지 손풀기 용으로 쓰였다는 인상입니다. 이야기에 핵이 되는 두 사건이 별다른 연결성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요. 사실 그리움과 원망이라는 서로 상이한 감정을 다루었으니 해석의 다양성과 이야기적 흥미를 더해주어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만, 딱히 구분되는 특이점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원망을 담은 경우엔 허수아비의 표정이 살벌해진다는 점 정도?


개인적으로는 시게루가 유키를 정말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사랑하고 있었느냐가 잘 표현되지 않았다고 여겨져서 더 몰입이 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그랬다면 그 정도로 사랑하는데 이상한 일은 겁난다 정도라고 판단하여 그 공포감에 더 주목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사건 자체를 달리볼 여지를 남기는 일이었는데 말이죠. 만약 그렇게 표현됐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요.


물론 이 에피소드의 백미는 지극히 흔한 발상이고, 너무나 주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것들로만 이뤄져 있기에(물론 요즘에 시골에 내려가 일일히 성묘하고 그런 게 드물긴 하죠.) 주변에 대입해서 볼 수 있는 공포라는 점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호러 장르에서


자주 이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 호러 영화 속 등장하는 연쇄 살인마는 일정한 분류에 따라 구분이 가능합니다. 살인행위에서 유희를 찾는 쾌락형 살인마, 스릴러적 구성을 위해 다양한 시설로 일종의 두뇌게임으로 몰고가는 퍼즐형 살인마, 일정한 도덕적 법적 책임을 물으며 인과응보적 구성에 일조하는 심판자형 살인마 등등등...


오늘 이야기할 '단독으로 살인시설을 설치하는 살인마'는 퍼즐형 살인마에게 특히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클리셰입니다.


반전을 위해 곳곳에서 사용되면서도 시설이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으려 했던 영화 하우스 오브 데스. 


살인행위, 특히 연쇄살인 행위는 철저한 비밀 하에 이뤄집니다. 사회의 기저에서부터 촘촘하게 연결된 구성망은 하나의 인격체가 또 다른 인격체를 반복해서 살인하는 일을 거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스템이 사각 하나 없이 완전히 뻗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여러 불운과 사회적인 무관심 그리고 몰이해로 인해 연쇄살인행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연쇄살인마들의 범죄행각은 등불 밑이 어둡다는 식으로 일어나거나, 아직까지 과학수사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의 일이거나, 사회적인 모순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회와 수사의 발전으로 인해 얼마든지 과거엔 연쇄살인마로 변화될 수 있는 살인자가 지금에 와선 여러 사유로 인해 한 번의 범죄 행위로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쇄살인행위는 지금에 와선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눈도주지 않는 취약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 되었다는 것이고요.


쏘우 영화 중, 그래 저거 한 두 사람이 저거 다 만들었다고 치자라고 넘겼던 사람들조차, 24시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공개된 지역에 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일 땐 황당해하더군요. 최소한의 현실성을 위한 당위성은 필요한 건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여러 시설을 이용해 연쇄살인행위를 저지르는 살인마라는 것은 점점 허황된 것이 되어 갔습니다.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며 사건과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을 범인들조차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거대한 시설을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고, 또 뒤처리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허황된 일로 여겨지게 되었죠.


더군다나 사람들이 인식하고 감탄하는 시설물의 기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져 점점 말이 되지 않는 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전문화와 분업화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시설물을 짓는 것도 여러 사람들의 협업을 요합니다. 설득력 있는 시설이라면 저걸 짓는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흘러 나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되었고, 허술한 시설이라면 저런 걸로 사람들이 죽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는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창작물은 편의적으로 이러한 시설물을 짓는 과정을 생략하거나,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쏘우처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굴기 시작하면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리는, 철저히 비현실적인 작품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H. H. 홈즈는 워낙 구별되는 특성을 많이 지닌 연쇄 살인마여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화로도 기획되고 제작 중이라 알고 있죠.


그렇다면, 이러한 클리셰가 자리잡게 된 이유는 뭘까요. 물론 푸른 수염류의 이야기나, 압도적인 계급을 이용하여 온갖 학대시설을 지어놓고 이용하는 정신나간 귀족에 대한 이야기가 적잖게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역사 속에서도 이와 관련한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100년도 전의 현실에서 거대한 시설물을 지어놓고 그것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인했던 연쇄살인마, H. H. 홈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그는 거대한 모텔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했고, 모텔 내 시설물을 이용해 시체를 소각하거나 유독가스를 흘러넣는 등의 살인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수십 혹은 수백명을 살인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법적으로 인정된 것만해도 수십명에 대한 살인행위였습니다.


그는 상기의 문제점-허술하게 지으면 효용이 없고, 너무 거대하게 지으면 소문난다-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을 발주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건설을 중지시키는 일을 반복하여 건설업자를 계속해서 교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체 건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게 하였고, 건설비까지도 줄일 수 있었죠. 물론 격동의 시기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이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말이죠.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오늘


다룰 클리셰는 이야기적인 편의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클리셰라기 보단 연출에 가깝다는 생각도 드네요.


간단히 예를 들어볼게요.


평소부터 맞지 않았던 두 라이벌. 최근에는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하나하나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갈등이 폭발하여 서로 대립하려는 그 순간, 갑자기 둘의 공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공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두 라이벌 사이에서 불거졌던 갈등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립니다.


익숙하죠? 이 클리셰와 비슷한 클리셰로는 내부의 갈등이 외부의 사건으로 해소된다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하다는 남녀간의 갈등 문제가 스파이 사건으로 해소됩니다.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유의미하게 작용되고 종료된 케이스라 이후에 다룰 작품과는 다릅니다.


클리셰라 불러도 될 정도로 여러 장르에서 쓰입니다.


가족물에서도, 배틀물에서도, 스릴러물에서도 자주 쓰였죠. 서먹했던 부자가 여러 사건을 거치며 친해진다, 제3의 적과 맞서싸우던 전사들이 친해진다 등등 어떤 주체를 삽입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관계가 서로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워보이고, 고운 놈은 뭘 해도 예뻐 보이죠. 심리적 갈등이 물리적 사건을 겪으며, 서로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인해 이전의 심리적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보자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리고 이것이 이야기적인 갈등을 해소시키는 것에 대한 장치로 활용하는 것도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일이고요.


가장 헛웃음 지으면서 봤던 케이스입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에서 가족, 친구, 연인 문제가 동시에 터졌는데 좀비 습격 한번에 모든 게 해결되었습니다. 고민을 깊이 다루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에 특별한 전환을 불러오는 것도 아니어서 뭐하냐 싶던 생각이 들었던 에피소드가 있었죠. 시즌3였나... 4였나...


문제는 이것을 무비판적인 차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적인 갈등을 해소하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점은 이겁니다. 갈등이 해소된 이후, 이전의 갈등은 없던 것으로 취급됩니다. 사실 이건 일어나기가 아주 힘든 일이죠.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도 이전의 사유로 인해 헤어짐이 반복되듯,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아주 근본적인 영역에 위치한 것들은 아무리 관계가 변화해도 계속해서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 갈등이 이후로도 계속해서 불거질 정도로 이야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처럼 보였을 경우라면 말이죠.


이 클리셰의 가장 큰 비판점은, 갈등사항이 불거지기 이전과 같이 내용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갈등 그 이상의 가치만 있다면 그러한 갈등은 뭉개져도 늘상 무방한 것처럼.


그래서 저는 이 클리셰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고 때론 그 질조차 변화시킵니다. 캐릭터의 관계의 급변은 자연스레 이야기의 질의 급변을 유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없는 것보다도 좋지 못한 일이죠. 뒤흔었들지만 변화는 없으니 결과적으론 질이 떨어지는 일이 되는 거니까요. 애초 갈등으로 설정하는 것이 관객 혹은 독자가 이전의 마찰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각할 정도로 몰입할 정도의 수위로 설정하곤 하니까요.


연재물, 장기 방영작의 문제와도 어느 정도 맞닿습니다. 어느 정도의 갈등으로는 더 이상 위기감을 조성하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이전에 비해 특히 구분되는 갈등을 설정했다간 이야기를 이어나가기가 힘들고. 그러다보니 갈피를 잃고 이야기의 질도 떨어지는 겁니다.


보통 이러한 클리셰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갈등은 대개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질을 변화시킬 정도라고 여겨집니다.


호러 장르에서 뜬금없이 법률문제가 불거지거나, 판타지 장르에서 리더로서의 책임에 대한 지탄을 받는 등- 이전의 이야기 진행을 위한 갈등과는 근본적인 성질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야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들도 이것이 심상치않은 위기이며, 그만큼 커다란 갈등이라 여기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변혁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기본적인 틀을 마련한 상태에서 미시적인 영역만을 일신하여 지속시키는 것에 비해 손이나 정성이 몇배로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수용자 입장에선 사기당했다라는 생각도 종종 드는 클리셰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돼지 숫자(비공인)


"어린이 여러분~"


"네!'


"오늘은 돼지 소풍 이야기를 할 거예요. 궁금하죠?"


"네~"


"자, 그럼 시작할게요."


"화창한 날이었어요. 엄마 돼지는 아기 돼지 7남매를 데리고 소풍을 갔죠. 김밥도 준비하고, 샌드위치도 준비하고."


"통닭이랑 삼겹살은요?"


"...취사금지 지역이라 그런 건 준비못했어요. 어쨌든 뒷동산에 오르던 엄마돼지는 여덟식구가 잘 따라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뒤로 번호를 외쳤어요."


"뒤로 번호요?"


"첫번째 돼지가 하나라고 외치고, 두번째 돼지가 둘, 세번째 돼지가 셋, 그렇게 순서를 세는 거죠. 장남 돼지가 '하나'하고 소리쳤어요. 그리고 장녀 돼지가 '둘'하고 외쳤죠. 그런데..."


"그런데요~?"


"아무리 반복해도 마지막 숫자가 7이 되는 거예요. 여덟식구가 올라왔는데 숫자를 외치는 돼지는 일곱밖에 없는 거죠. 엄마돼지는 당황했어요. 아무리 둘러보고 살펴봐도 어떤 아기돼지가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던 거죠. 엄마돼지는 소리쳤어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누가 없는 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


그때 귀여운 막내 돼지가 외쳤어요.


"엄마~ 엄마도 숫자에 넣어야 죠!"


그제서야 엄마돼지는 자기 실수를 알게 되었어요. '아차, 내가 숫자를 세다보니 나를 빼놓고 숫자를 세 버렸구나!' 하면서 말이죠. 


"어린이 여러분! 어린이 여러분은 엄마돼지처럼 전체 숫자를 셀 때 자기만 빼고 세면 안되는 거예요, 알겠죠?"


"네에!"






...익숙하죠? 실제로 유치원에서부터 종종 듣는 이야기지만, 정작 특별한 명칭을 붙여서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예전 신해철이 라디오에서 돼지숫자 셌다며 숫자를 세는 주체를 빼먹는 행위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그 부분을 이어갑니다.


실생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주변에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많은 경우, 자신 역시 구성원임을 망각하기 좋은 환경이 되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전체의 총합은 기억에 남지만 그것을 검산하는 과정 일부는 소실해 버리는 경우 발생하죠.


창작물에서도 자주 활용됩니다. 물론 캐릭터의 급박하거나 다소 모자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됩니다만, 백미는 반전을 위해 활용할 때입니다. 다수의 캐릭터 가운데 화면이나 컷 내에서 행동이 묘사되는 캐릭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히 관객이나 독자는 묘사되지 않는 캐릭터 역시 씬 밖에서는 행동이 지속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간주하죠. 이러한 독자나 시청자의 인식의 빈 틈을 파고드는 것이 바로 돼지 숫자입니다.


알포인트는 돼지 숫자를 상당히 세련되게 활용했는데, 전체인원을 사진속 인원과 등치시키며, '사진을 찍은 사람의 숫자'에 바로 관객의 시선이 가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잘 활용한다면 관객의 뒤통수를 훌륭히 때리는 좋은 반전의 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캐릭터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졸책이 될 수 있죠. 그에 따라 의도적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면서도 반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캐릭터도 속지만 관객도 함께 속는 기술적인 재량이 필요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작년


5월에 메모하고 등록한 후 방치하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글을 이어 씁니다.


금일 다룰 클리셰는 평범한 물질이 이질적인 적의 약점이다라는 클리셰입니다. 이 클리셰는 톰 크루즈가 주연한 우주전쟁(세균),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주연한 에볼루션(샴푸의 성분), 멜 깁슨 주연의 싸인(나무)처럼 외계인이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겐 일상적으로 흔한 물질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무해하다는 소리인데,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소리니까요. 자연히 외계인으로 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외계인이 아닌 존재를 대상으로 해서도 얼마든지 해당 클리셰가 작동합니다. 악마라거나 마족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예컨데 아벨탐험대의 마왕 바라모스는 깨끗한 물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꼬비꼬비의 망태할아버지는 착한 아이의 오줌이 약점이었고요. 최초로 자연계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에넬은 고무가 약점이었습니다.


총칼로도 처치하지 못하던 적이 결국 또 다른 지구의 구성원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이것을 자칫 잘못다루면 모든 게 정해져 있었다느니 누군가의 가호를 받느니 하는 식으로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는 다양한 이야기의 구조를 완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클리셰는 보통 익숙한 주제와 합치될 때 비로소 편의성과 집중력을 갖추는데, '평범한 물질이 이질적인 적의 약점' 클리셰는 이 폭이 아주 넓습니다. 이야기적인 반전을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고,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출에서도 활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계도적인 측면에서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보통 이야기는 주인공의 주체적인 행동과 그를 뒷받침 하기 위한 노력, 그를 뛰어넘는 운과 불행 등이 불확정성을 더해주어 독자를 보다 매혹시키고 몰입시킵니다. 강력한 적은 이러한 주인공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통해 위기감을 고조시키죠.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은 강력한 적일 수록 그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설정하곤 합니다. 이것은 게임 밸런스적 발상이라 종종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편의성 측면도 작용한 결과입니다. 비중의 분산과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일례로 우주전쟁의 세균의 경우, 우주라는 넓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고, 그들끼리 작용하기에 오직 인간만이 우주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한다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사용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의 바라모스는 우리 모두 물을 깨끗하게 사용해서 그를 통해 마왕을 물리치자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끌어왔습니다. 원피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주인공을 부각시키고 세계의 확대를 표현하기 위해 위 클리셰를 끌어왔고요. 이 외에도 인간의 의지보단 우연이나 더 큰 무언가의 의도가 녹아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의 연출을 위해 위 클리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상속에서 흔히 놓치고 있는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로 소화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는 그만의 의미가 있다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요.


싸인은 하필이면 나무와 물이 약점입니다. 물이 표면의 70프로 이상인 지구에, 온갖 식물로 둘러져 있는 농장에서 저 둘이 약점인 외계인이 나오지 영화의 만듦새와는 상관없이 작위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죠.


엇비슷한 클리셰로는 아무 생각없이 갖고 있었던 물건이 사실 적에게 치명적인 물건이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주셨던 목걸이의 보석이 사실 적을 물리치는 보석이더라~ 생계를 위해 사고파는 마약이 사실 괴물을 물리치는 물질이었다더라(영화 패컬티)~ 등등 물건의 평범함이 작용하지 않거나 말 그대로 우연성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알고봤더니 적의 약점이더라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의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어찌되었건 이만큼물론 상당히 낡은 클리셰다보니 지금 와선 적잖게 비판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장 우주전쟁의 경우 "신체구성요소부터 다른 외계인에게 지구의 세균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며 당대 과학잡지에서 이야기되기도 했었고, 싸인은 "딴 건 다 웃고 넘기겠다. 근데 대기 중 수증기는?"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었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은 이질적인 존재들도 일찍부터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데, 저것이 주인공과 엮이고 주인공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은 후, 비로소 터져나온다는 것에 대해 작위적이라 비판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익숙하죠?


여러 연애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클리셰입니다. 따로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굳이 설명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호감은 있지만,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남녀가 있습니다. 남성 캐릭터는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져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여자 캐릭터는 겉으로는 드세지만 사실 속으로는 섬세하여 상처받을까 그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주변을 머물기만하던 그 때, 우연히 남자 캐릭터가 발이 걸려 넘어지며 여성 캐릭터 위로 쓰러지게 되고 우연히 입술을 마주하게 됩니다. 의도치 않은 신체적 접근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는 이런 저런 계기가 되고 이후 알콩달콩....


단순히 장난치다 뒷 사람에게 부딪혀 입을 맞추는 정도는 서양의 작품에서도 간간히 볼 수 있는 것이긴 한데, 넘어지는 정도로 움직임이 큰 가운데 사고로 입을 맞추는 장면은 재패니메이션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 부딪혀 넘어졌는데 부딪힌 사람이 전교회장이더라... 류의 클리셰의 변형인 걸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 정말로 익숙하죠?


보통 영화나 드라마보다는 만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클리셰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죠. 입술은 신체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고, 치아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또 인간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하고, 또 안면에서 가장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다름아닌 코니까요. 두 사람이 넘어지면서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실제로는 반사적으로 서로 가장 단단한 부분을 맞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 이마끼리 박치기 말이죠. 


넘어지면서 키스한다는 건 신체구조와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과정에서의 신체 움직임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실제 인간이 저러한 움직임을 하면 너무나 어색해 보이는 거죠. 균형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 컨트롤을 잃는다는 의미인데, 키스는 사실 너무나도 섬세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라도, 필연적으로 머리 움직임은 다른 신체에 비해 느리고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이나 자세의 흐름을 왜곡할 수 있는 만화에서 더욱 자주 이용되는 클리셰인 이유입니다.




물론 두 사람이 넘어지면서 입술을 마주댈 확률이 전무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엇비슷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고요. 다만, 입술만 마주치고 마는 수준의 충돌이 아닐 거라는 게, 그리고 인간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얼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문제죠.


물론 미남이시네요의 박신혜와 장근석, 금옥만당에서 장국영과 원영의 등 실사 작품이라 하더라도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작품에서도 애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입술만 부딪히지 않았지 사고로 인해 신체접촉이 일어나 얼굴을 가까이 한 두 사람 사이에 성적 긴장감이 일어나는 경우는 경우는 이보다도 마일드한 분위기의 작품은 물론, 훨씬 농염한 장르에서도 얼마든지 활용되곤 합니다.


물론 어색하긴 합니다만, 화면을 어떻게 잡느냐, 구도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냐 등등을 따져보면 얼마든지 실사에서도 활용할 수 있고, 또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어색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진 못하지만.


이 클리셰는 단연코 캐릭터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의 변화를 위해서 자주 애용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가까워지는 것도 가능하고, 반대로 멀어지는 것도 가능합니다. 계기로 자주 이용되는 클리셰라는 거죠. 이 클리셰를 정말로 애용했던 것이 아카마츠 켄의 러브 히나라는 작품인데 다양한 변주가 등장합니다. 키스 외에 다른 신체적 접촉도 있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에 들어가기도 하고, 관계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요.


애용되는 클리셰지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독자들도 여기고 있기 때문에 가벼운 러브 코미디 장르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족인데, 글을 입력만해놓고, 등록은 이제서야 합니다.


그런데 자그마치 2년 전에 등록했던 글이었네요. 애초에 무슨 작품을 보고 이런 글을 쓰게 된 건지에 대해서도 완전히 까먹었습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여러 수단 중엔 거울 통해 바라본 자신의 모습과 타인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거울을 통해 인식하는 자신도 좌우가 반전된 모습이기 때문에 타인이 인식하는 자신과 자신이 인식하는 자신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라고 확신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또한 다른 물체를 통해 비추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너지기 쉬울 수 있다는 거죠.


더군다나 현대사회는 복잡화, 다양화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여러 영향을 받고, 맺고, 떨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가운데 동경이란 감정이 있을 수 있겠고, 또 혐오라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겠으며, 또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으나- 무관심이라는 감정이 있을 수도 있겠죠.


오늘 이야기할 이토 준지의 얼굴도둑이라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굴도둑의 줄거리는 이하와 같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전학을 오게 된 마치다는 자신의 주변에 끈덕지게 달라붙은 가메이에게 심한 불쾌함을 느낍니다. 그녀에게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녀와 똑같이 생긴 같은 반 내의 다른 학우에게도 그녀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달라 이야기하지만, 가메이는 들은 척 만 척하고 학우는 가메이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판 남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런 마치다 앞에 나타난 히비노는 가메이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과 똑같아 지는 가메이의 특이체질을 이야기하며, 그녀를 얼굴도둑이라 지칭합니다.


The Face Burglar 顔泥棒


어찌보자면 참으로 흔한 이야기인데, 이 에피소드는 특이하게도 저 얼굴도둑이 가진 고충에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패션에 대해 꽤나 둔감한 편입니다만, 주변에서 흔히 똑같은 옷을 입고 온 이들이 서로에게 불쾌해하며 다른 옷을 입으라 장난스레 말하는 경우는 자주 봐왔습니다. 자기 나름의 개성을 복식에서 표현해냈는데, 그게 다른 사람과 놀랄 정도로 비슷해버리면, 자신의 개성이 별 거 아니라거나, 자신이 타인과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이 흘러갈 수도 있는 거죠.


옷차림만으로도 그러할 진데, 타고나는 얼굴로 가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집니다. 분명 얼굴은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만, 지금에 와선 이 타고난 차이를 더욱 좁히는 여러 수단이 등장했습니다. 성형수술에서부터 시술, 화장법 등등처럼 말이죠.


완전히 동일한 예라고는 할 순 없지만, 똑같은 옷 맞춰 입고 오라고 하면 꼭 튀는 옷 입고 오는 사람들 있죠. 누군 그렇게 입고 올 줄 몰라서 안 입고왔냐며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하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름을 전제로 서로를 인식합니다.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서로를 친숙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너무 심할 정도의 공통점은 때론 서로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겁니다. 비단 자신의 정체성 문제가 아니라, 희소성을 통해 자신의 상업성을 유지하는 보여지는 직업군- 모델이나 배우 등등의 사람들에게 이는 때론 존재의 위협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일이 됩니다. 사진작가나 모델이 니가 내가 서로 베꼈느니 먼저였느니 하는 일이 드물잖게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죠.


얼굴도둑이라는 소재가 동서양을 비롯해서 비교적 넓게 퍼진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내가 나이기 위한 유일했다 생각하는 요소를 다른 이가 갖고 있을 때, 자신의 입지나 정체성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공포로 치환시키는 것이죠.


예컨데 손발톱을 아무 데나 버리면 쥐가 그걸 주워먹고 손발톱 주인의 모습으로 사람 행세를 한다는 것, 인간의 머리를 먹고 신체를 지배하며 인간 주위에 뒤섞인 기생수의 괴물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또 다른 자신을 견디지 못해 심지어 죽이기까지 만들었던 드래곤라자의 영원의 숲, 인간으로 둔갑해서 공격한다는 무수한 신화 속 괴물들 등이 그러한 예에 포함될 겁니다.


같은 측면에서 얼굴은 물론 육체까지도 강탈하는 바디스내쳐 등의 콘텐츠는 얼굴도둑 클리셰의 상위개념이라 할 만합니다.





얼굴 도둑이 이야기적으로 특이한 것은 흔히 얼굴을 훔쳐가는 존재를 요괴, 외계인, 귀신 등으로 표현하는 여타의 콘텐츠와 달리 단순히 특이한 체질을 지닌 인간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특이한 체질은 오직 육체적인 것만으로 한정될 뿐, 정서적인 측면에선 되려 자신만의 그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정하다는 인상마저 줍니다.


실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가메이는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절망하고 공포에 빠지는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그녀를 몰아부치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정체성 그대로를 온전히 드러낸 채 그녀에게 접하는 이들이 아니라, 가면으로 자신을 감춘 채 그녀에게 덤벼드는 인간들이고요.


실제로 거울은 정체성을 투영하는 상징으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컨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했던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에서 여왕은 거울 속에서 자신이 아닌 미를 찾고자 했지만, 공주는 갑옷과 검을 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았었죠. 영화가 눈으로 보여지는 화려한 미가 아닌 진정한 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거울속 비춰지는 모습은 상징일 뿐 중요한 건 그 자신이라는 걸 역설했던 겁니다. ...영화는 구렸지만.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가메이는 히비노의 얼굴을 따라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히비노에 대한 이성적인 감정만으로는 그녀의 특이체질이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어째서 가메이는 히비노를 닮지 않았을까요? 이를 파악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과 히비노의 차이를 찾아내야 합니다. 히비노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메이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의 얼굴로 돌아와야 한다 이야기하는 인물이죠. 훔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관심없다고 하면서요. 그녀를 골칫거리로 여기고 쫓아내려고만하는 사람들의 태도와도 다릅니다. 히비노는 가메이를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어 대하며, 그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렇기에 가메이는 그런 히비노와 자신의 차이를 인지하고, 그와 닮지 않게 될 수 있는 거죠. 그렇기에 이것이 그녀가 히비노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동시에 자신의 모습으로 히비노에게 가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이러한 불행이 닥쳐온 것은 아니었을까요?


둘째. 거울. 마지막 순간 가메이는 거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가메이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선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야 한다 이야기했었지만, 과연 그랬을까요? 서두에서처럼 거울을 가까이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스스로 유지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가메이는 단순히 얼굴이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까지도 비슷하게 흉내냅니다. 주변 사람들이 속을 정도로요.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알아내는 것은 히비노 정도고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가메이의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가면. 가메이의 불행은 결국 그녀를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가면은 그러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난 것이죠. 타인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때론 가장 큰 공포와 절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소리처럼 읽힙니다. 동시에 그런 가면이 개인의 정체성 그 자체는 아닐진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가메이의 모습도 말이죠.





얼굴은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얼굴이 아무리 똑같아도 개인과 개인을 구분하는 무수한 요소들이 있으니까요. 당장 쌍둥이를 생각해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피상적인 요소만으로 한 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본 편의 포인트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를 위해 이야기는 공포의 대상의 이내 연민의 대상으로 뒤바뀌고, 지극히 평범하다 생각했던 일상의 요소가 공포의 대상으로 치환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진짜 무서운 공포는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취하는 태도 속에 녹아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하고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얼굴'도둑'이라는 제목과 초반부 가메이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권선징악형으로 분류하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습니다.


호러로서의 포인트는 아예 골격조차 다른 두 얼굴이 병존하는 모습이나, 가면마저도 쫓아가는 가메이의 모습을 짚을만 합니다만, 만화 캐릭터의 얼굴을 가면으로 쓴 평범한 사람들이 주는 공포에는 쫓아가지 못합니다.


배너를 슬슬 바꾸고 싶은데.....


여담으로 블랙잭, 기타로, 울트라멘 세븐 등등의 캐릭터 가면을 쓴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글이...


두 번 정도 날아간 다음에 다시 쓰는 글입니다. 윈도우 업데이트로 한 번, 다른 한 번은 도통 뭔 이유 때문에 날아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엔 임시저장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이런 일이 벌어져도 다시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최근엔 왜인지 저 기능이 작동을 하질 않네요. 거 참...


여하튼 금일의 클리셰는 자그마한 노인이 사실 엄청난 강자였다입니다.


오늘 날 격투기는 지극히 기존의 경험을 데이터화하여 그것이 보다 선수에게 효과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현대기술의 총아에 가깝습니다. 부상에서 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부상을 최대한 적게 받고,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타격은 높이고, 상대의 기술에 대응하고, 그 마음가짐이 어떠한 것이 더 효과적인지, 호흡은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등등에 대해 정형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스포츠학은 물론 의학에서부터 심리학, 심지어는 철학에 물리학까지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격투기 선수지만, 그 선수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데엔 이러한 이러한 제반사항을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자그마한 노인이 사실 엄청난 강자라는 클리셰는 그리 현실성이 없는 것입니다만, 동시에 왜 저런 클리셰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도 되어 줍니다.


오늘 쓸 글의 발단이 되었던 스타워즈의 요다. 포스 그 자체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오늘 날 인간의 육체는 20~40 시점에 가장 강인하다 흔히 알려져 있고, 실제로 스포츠 스타의 전성기는 종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적절한 경험과 육체적 강인함이 최적의 시너지를 발휘하는 20~30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성기에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던 이라도, 늙고 쇠약해지면 일반인보다는 뛰어날 지언정 이전에 비할 수는 없게 되는 거죠. 사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새삼 언급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고 자그마한 존재가 엄청난 강자로 나오는 콘텐츠의 숫자는 적지 않습니다. 스타워즈의 요다가 그렇고, 란마의 핫포사이가 그렇고, 공태랑 나가신다의 전선도 그렇고, 쿵후보이 친미나 권법소년의 노인 고수들, 헌터X헌터의 회장, 은혼의 야규가의 할아버지, 그리고 무협지의 무수한 노인 초고수들도 그러합니다.


이는 경험이 충분히 검증할 정도로 데이터화되어 쌓이지 않은 사회 시스템 하에서, 개인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노인 무술가가 지닌 자기만의 요령과 비법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선망으로 인한 요소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환상은 지금도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죠. 강함이 경험(내지 수련)과 정비례하도록 설정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육체가 노쇠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둔감하게 작용하는 성질이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나이를 먹고 약해지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젊고 어리기만한 이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일종의 박탈감이 작용하기도 할 거고요.


특히 격투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성장이 주요한 소재일 수밖에 없는데, 왕년의 고수가 지금은 약해졌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를 했다간, 주인공의 노화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구성하기가 더 까다로운 것도 사실이고요.


핫포사이와 코롱 할머니. 작중 최강자들입니다. 물론 코미디 장르다보니 그게 부각되지는 않죠.


이러한 연유로 인해, 단순히 육체적인 요소만이 강함에 반영되지 않는 설정이 가미되곤 합니다. 일례로 아예 초인적인 육체를 지니고 있어 노화로 인한 약화가 반영되지않는 사상최강의 제자 켄이치와 같은 사례도 있고, 스타워즈의 요다나 헌터X헌터의 회장처럼 육체적인 강함이 아닌 넨이나 포스와 같은 요소가 결부되어 있거나, 권법소년처럼 육체의 노화로 인한 약화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늦출 수 있으며 꾸준한 노력과 수련은 이러한 육체의 노화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절기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래곤볼의 무천도사나 페어리테일의 마카로프처럼 육체 자체가 거대해지는 경우도 존재하기도 하고요. 물론 란마처럼 코미디의 성격이 짙어 이러한 육체적인 노쇠가 묵직하게 다뤄지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노인 캐릭터를 강자로 만들었을 때 일종의 반전 효과를 통해 이야기에 신선함을 불어넣을 수 있고, 캐릭터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을 통해 보다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며, 무엇보다도 나이듦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낮출 수 있다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글 아이디어 노트에서 컴퓨터로 옮긴 후 한달만에 완성하네요. 두번이나 날아가고 나니 쓰기가 싫어져서.... 지금도 허겁지겁 마무리 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이번에


다룰 클리셰는 본류가 되는 콘텐츠가 너무 유명해서 클리셰를 넘어 오마주나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다 보아야 할 정도입니다. 한 때 차용하여 장르적 특성으로 거듭날 정도가 되는가 하는 생각도 갖게 만들었지만, 원형이 되는 콘텐츠의 영향력이 너무나 길게 이어져 해당 연출 자체에 원작의 성격이 계속해서 잔존하여 해당 연출을 차용하고서 따로 독창성을 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거죠. 그렇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짧은 그 시기에 클리셰로 활용된 전적이 있기에, 다루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오늘 다뤄볼 클리셰는 '전투 중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클리셰로는 '드래곤볼'에서 나온 '초사이어인'이 가장 유명합니다. 파워업을 특정한 이벤트를 통해 이뤄지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한다면, 단연 드래곤볼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요. 또한 현 시점에선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라고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를 콘텐츠이기도 합니다.


28이라는 숫자가 제겐 각별한데 손오공이 초사이어인 상태로 프리더와 맞붙는 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28만 보면 설렙니다.


물론 드래곤볼에서는 초사이어인에 앞서 계왕권처럼 붉은색으로 오라와 머리색이 바뀌는 연출이 존재했고, 드래곤볼 이전에도 파워업하면 몸에서 오라가 치솟으며 그 오라에 머리색 등이 물드는 듯한 연출은 소년 만화 내에도 엄연히 존재했었습니다. 일례로 근육맨의 스쿠루는 머리털이 없지만 눈동자색이 변하는 연출이 있었죠.


하지만 슈퍼사이어인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확연한 외형적 변화가 뒤따랐고, 순간적인 기세 정도로 치부되던 것을 명백한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벤트와 결부시키며 파워업 그 자체를 순수한 연출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앞으로의 액션이나 이야기의 전개만이 아니라, 아예 캐릭터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뒤바꾼 거죠. 손오공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대변되던 캐릭터이다 이후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대변되는 캐릭터로 바뀐 것처럼요. 결과적으로 슈퍼사이어인을 소개한 드래곤볼은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의 변신 연출을 확립해낸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이것은 여러 작품에서 차용되어 활용되었습니다.


예전 드래곤볼이 90년대 한국만화에 끼친 영향에서도 드래곤볼이 끼쳤던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던 바 있고, 당시에도 그 이야기의 중심은 단연 슈퍼사이어인이었습니다.


붉은매의 캐릭터를 두고 초사이어인 로제니 블루의 예언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필연입니다. 90년대 초중반 소년만화계 분위기가 어땠냐면 파워업하면 머리색 변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는 식이었고, 붉은매나 지금의 드래곤볼 슈퍼나 완전히 같은 인식으로 캐릭터에 변화를 줬습니다.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닮은 모양으로 도출된 거죠.


이 클리셰가 이용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확연히 눈에 드러나는 파워업 이벤트를 전투중에 치룰 수 있다는 간편성, 그리고 명백히 인식되는 캐릭터의 변화, 그리고 결정적으로 표현의 경제성입니다.


이전에도 피땀어린 수련을 통해 머리가 하얗게 세는 등 캐릭터의 능력의 변화가 외형의 변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존재했었습니다. 캐릭터의 각성과 본질적인 성격의 변화라는 측면에선 넓게 보아 파워업하면 머리색이 변한다의 한 갈래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투중 이러한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도식을 한 번의 전투를 통해서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집니다. 연재물은 그 특성상 몰입의 그 순간을 위해 중언부언을 꺼리고 속도감있는 전개를 지향하죠. 그러한 측면에서 전투 중 머리색이 변하는 것이 파워업을 나타내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강점을 가집니다.


슈퍼사이어인을 오마주한 슈퍼 소닉. 사실 이 쪽은 파워업했더니 몸이 빛나더라, 파워업했더니 머리 카락 외에 다른 부분의 색도 바뀌더라 클리셰에도 포함됩니다.


둘째로는 캐릭터의 변화가 확연하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도 물론 괴물로 변하거나, 뛰어난 무기나 장비를 하는 것을 통해 외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표현이 더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고, 전자는 따라하고픈 변신이라는 측면에선 궤가 벗어나 있었으며, 후자는 캐릭터의 본질적인 변화나 파워업이라고 말하기엔 무색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머리색은 단시간 내엔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특히 그림에서는 캐릭터의 개성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변화시켜 이 파워업이 캐릭터의 본질적인 변화이며 캐릭터의 개성도 달라졌음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변화의 폭이 아예 기존의 캐릭터와는 인식을 달리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아, 일종의 색놀이로서의 흥미를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반복되면 상당히 지루한 느낌을 줍니다다만, 이거야 오늘 다룰 이야기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쥐라기 월드컵에도 나옵니다. 애초에 쥐라기 월드컵을 보노라면 드래곤볼의 영향을 꽤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죠. 여하튼 여기에 나오는 늑대 로보는 경기에 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황금늑대로 변하고 몸집도 커집니다. 초사이어인을 염두에 둔 거죠.


무협만화에 말을 그리지 않는다거나, 화려한 복식이나 갑옷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첫번째로는 맨몸으로 액션을 하는 것이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며, 둘째로는 인간을 그리는 것에 비해 손이 몇배로 간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그에 수반된 부가적이 묘사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머리색이 변하는 파워업도 근본적으로는 같습니다. 기존 연출 방법대로 따르면서도, 머리색의 변화 정도만을 표현하여 상황이 달라졌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드래곤볼도 슈퍼사이어인을 하고났더니 먹칠을 하지 않아 좋았다같은 류의 농담이 나돌기도 하죠.


블리치의 무월은 밝은 색이 기본형인 상태에서 어두운 색으로 변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연출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볼이 현역으로 계속해서 활약했고, 더 나아가 후속작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드래곤볼로서의 색체가 너무 강한 방식의 변신은 지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식은 완전히 같지만 몸에서 오라만 뿜어져 나온다거나, 머리색이 변하긴 변하는데 노란색은 아니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초사이어인 자체가 드래곤볼의 아이콘화된 상황이고, 또 앞으로 십수년 아니 수십년은 우려먹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기에, 이것은 인용의 대상은 되겠지만, 이전의 클리셰처럼 차용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몇몇 공식은 비틀어 계속해서 이용될 것이라고 봅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


 이번에


다룰 클리셰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는 클리셰입니다.


아마 나루토 등에서 가장 자주 본 장면일 겁니다. 두 팔을 벌리고 달리는 장면 말입니다. 실제로 이걸 두고 일종의 농담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고, 이걸 두고 나루도 달리기, 닌자 달리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연출되는 장면이 클리셰화되어 굳어진 것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만화 작가들이 그것을 답습하고, 그것을 또 애니메이션이 강화하여 강조해 연출하다 아예 일종의 스타일로 굳어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클리셰가 이용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만화의 연출이 애니메이션으로 따라온 것, 둘째는 개성 포인트 강조, 셋째는 연출의 경제성을 위함입니다.


아라레의 달리는 모습은 이미 아이콘이죠. 물론 저렇게 달리는데엔 등신대의 역할도 컸을 겁니다. 2.5에서 3등신이니...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한 배를 둔 형제같은 사이기는 합니다만, 동화와 원화인 만큼 완전히 동일한 콘텐츠는 아닙니다. 컷 안에서 완성되는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장면의 흐름 속에서 해당 장면을 소화해야 하죠. 이를 위해 연출을 각색하는데, 때론 만화의 인상적인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오기도 합니다.


만화는 그 특성상 상반신에 주로 포인트가 맞추어 집니다. 말풍선, 캐릭터의 표정, 움직임이나 행동 등등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려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죠. 필연적으로 상반신만으로 입체감과 속도감을 드러내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현실과는 다른 방식의 만화적 연출을 통해 구도를 잡습니다. 마치 몸이 너무 빨리 움직여 팔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과정을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양팔은 뒤로 밀리는 것 혹은 벌어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두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도 한 장면 안에 효과적으로 표현되고요. 


사진 혹은 움직이는 사진으로 본다면 상당히 어색한 장면입니다만, 그림과 사진은 차이가 있어, 이러한 연출은 애니메이션에선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클리셰로 자리잡게 되었고요.


 

정면샷으로는 별다른 이질감을 못느낍니다.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측면 아래에서 위 그리고 같은 자세로 달리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이질감은 심해집니다. ...뭐. 원리는 사이클처럼 상체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달린다는 거겠지만 말이죠.


둘째로는 개성의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닥터 슬럼프의 아라레처럼 귀엽고 웃기기 위한 케이스도 있고, 대운동회의 토모에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표현하기 위함도 있겠고, 드래곤 리그의 야크처럼 속도를 중시한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습니다. 나루토의 경우처럼 닌자의 고유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도 있겠고요.


결국 이 또한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한 요소인데, 특이하게 정면이 아니라 측면, 그리고 전신이 다 나오는 경우에도 팔을 벌리고 뛰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상기한 예들 가운데 아라레는 유아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마치 비행기를 흉내내는 듯한 장난스러운 몸짓이고, 토모에는 말 그대로 제트기류(!)를 발생시키기 위해 양력을 받으려 팔을 벌리는 것이니 뒤의 것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들의 경우는 말 그대로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수련을 통해 스타일화 된 케이스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게다 수련법과 일정부분 닮아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굽이 아주 높은 게다 위에 올라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 그 쓰러지는 힘을 받게 되고, 다리는 끊임없이 움직여 평소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진짠가?)는 것을 만화적으로 표현한 거죠. 실제로는 그러한 게다 수련법에서도 양 팔은 끊임없이 앞뒤로 움직이며 균형을 잡습니다만. 여하튼 머리를 앞으로 한 상태에서 양 팔을 뒤로 뻗으면 빨라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찌되었건 사실입니다. 시각적인 효과때문인지 아니면 반복된 연출로 인한 학습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위 게다 수련법 때문인지 이러한 연출을 특히 닌자물에서 자주 보여집니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팔조차 몸의 움직임을 못쫓아간다는 식으로 연출됩니다. 물론 진격의 거인에서는 달리기에 적용되는 건 아닙니다만 원리는 같습니다. 결국 속도감을 나타내기 위한 시각적인 요소가 고려되었다는 거죠. 대운동회의 라리같은 캐릭터가 스텔스 형으로 헤어스타일을 갖춘 경우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에반게리온과 같은 메카물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로봇이기에 보다 덜 이질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죠.


마지막은 연출의 경제성입니다. 생각해보시면 위 장면은 특히 대화 때 자주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체는 대화를 위해 앞으로 숙였다는 점 외엔 특이할 게 없지만, 다리는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이러한 상체와 하체의 분리는 이야기의 진행과 캐릭터의 이동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연출적인 측면에서 꽤나 경제적이죠. 이야기의 흐름을 대사로 잡아주면서, 이동의 과정을 묘사하여 나름대로의 현실성을 부여해줍니다.


동시에 이러한 달리기는 팔을 앞뒤로 움직이는 것보다도 연출이 쉬울 뿐더러, 시청자가 팔이 움직이는 것에 주목하여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만들며, 동시에 팔이 왔다갔다 하는 장면을 붙여넣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상하의 움직임만 고려하여 적은 컷으로 연출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동화 자체가 극단적으로 줄어드는 거죠.


이누야샤도 양 팔을 벌린 채 달리는 캐릭터가 많이 나옵니다. 다카하시 루미코라는 작가 자체가 특정 포즈를 자주 활용하기도 합니다만, 애니메이션도 동일하게 나아간 건 결국 저 펄럭거리는 옷감이 왔다갔다하면 표현하기가 너무 귀찮아지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달리는 게 정체성인 코우가같은 캐릭터는 복장 자체가 상당히 가볍죠.


물론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러한 연출은 일본 애니메이션(그리고 그에서 짙게 영향을 받은 콘텐츠들)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다른 방식으로도 빠른 속도감이나 캐릭터의 이동과 내용의 진행과 정리를 동시에 수행하기도 합니다.


Posted by 주인장 알숑규